[한국농어촌방송=김세곤 칼럼니스트] 영월 장릉(단종 묘소)의 장판옥 3칸의 방 중 오른 쪽 방에는 환관위(宦官位) 44인, 여인위(女人位) 6명의 이름이 적힌 위패가 의자 위에 놓여 있다. 1)

사진=환관위와 여인위 위패

먼저 환관위 위패부터 본다. 맨 오른편에 ‘환관위(宦官位), 계유 병자정축 사사인(死事人)지신(之神)’이라고 적혀 있다. 계유는 1453년, 병자는 1456년, 정축은 1457년이다.

다음 줄에는 사예 (司詣) 황귀존, 황경손 · 황장손(황귀존의 아들), 고양기관(記官) 이식배, 귀진, 고양기관 중은(仲銀)의 이름이 적혀 있다.

황귀존은 계유년(1453, 단종1)에 안평대군에게 가담한 죄에 연좌되어 죽었는데, 아들 경손과 장손도 같이 죽었다. 고양기관 이식배는 안평대군을 따라 사냥을 하고 또 안평대군의 말을 집에서 길렀다. 이식배가 죽음을 당하고 나서 그의 아들이 수감되자, 이식배의 아내가 조밥을 차려 이식배의 주검 앞에서 제사를 지내고 목을 매어 죽었다.

이어서 순흥품관(順興品官) 안순손, 순흥품관 김유성, 순흥품관 안처강, 순흥품관 안효우, 순흥기관(順興記官) 중재, 호인(중재의 아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이들은 정축년(1457, 세조 3)에 금성대군 사건에 연좌되어 죽었는데, 의금부가 아뢰기를, “금성대군이 순흥에 안치된 이후 딴 뜻을 품고서 중재ㆍ안순손ㆍ김유성ㆍ안처강ㆍ안효우, 군사 황치ㆍ신극장에게 뇌물을 주어, 중재의 아들 호인을 시켜 옛 종 정유재와 그의 무리 범삼, 석정, 석구지, 범이 및 풍산 관노(官奴) 이동과 공모하여 군사를 일으키게 하고는 맹세문을 작성하여 중재와 함께 서명하고 맹세한 사실을 중재 등이 모두 초사(招辭)에서 승복하였으므로, 마땅히 참하여야 됩니다.” 하니 세조가 따랐다.

이어서 환관(宦官) 김연 · 한숭의 이름이 나온다. 환관 김연과 환관 한숭은 1453년 계유정난 때 김종서가 죽음을 당하고 나서, 단종의 곁에 있어서 그 당시는 어쩌지 못하다가, 그 뒤에 세조가 김연과 한숭을 죽였다.

다음은 환관 엄자치, 환관 윤기, 환관 김충, 환관 이귀, 환관 인평, 환관 유대, 환관 박윤, 환관 길유선, 환관 조희, 환관 서성대, 환관 김득성, 환관 김득상, 환관 최찬이다.

여기에서 눈에 띄는 것은 환관 엄자치이다. 엄자치는 세종 · 문종 · 단종 세 임금을 모신 환관이었고 단종의 측근이었다. 그런데 계유정난에 성공한 수양대군은 단종 측근을 몰아내고자 엄자치를 제주도 관노로 보냈는데 1455년 3월27일에 제주도로 가는 도중에 죽었다.(단종실록 1455년 3월 27일)

정조의 『홍재전서』에는 “을해년(1455, 단종3)에 빈청이 아뢰기를, “엄자치 등은 국정에 간여하여 조정을 능멸하였고, 윤기는 화의군 이영의 환관이므로 궁중에 그냥 두어서는 아니 됩니다. 최찬 등과 같은 하찮은 환관도 다 조정을 업신여기며 횡행한 죄가 있습니다. 모두 축출하소서.” 하였다. 엄자치, 윤기 등을 모두 나포하여 의금부에 내려 보냈는데, 윤기 등은 곧 사사하고 엄자치는 고신(告身)을 빼앗고 가산을 적몰한 다음 제주도의 관노로 이속시켰는데, 가는 도중 길에서 죽었다.”고 적혀 있다.

이 일들은 단종의 수족을 하나씩 잘라내는 조치였다. 수양대군은 1455년 윤 6월11일을 ‘대권 탈취의 날’로 정하고, 이날 금성대군이 세종 후궁인 혜빈양씨 ·상궁박씨· 한남군 · 영풍군· 동지중추원사 조유례·호군(護軍) 성문치 등과 함께 난역(亂逆)을 도모한다고 몰아, 혜빈양씨를 청풍으로, 상궁박씨를 청양으로, 금성대군을 삭녕(朔寧 경기도 연천)으로, 한남군을 금산으로, 영풍군을 예안으로, 정종을 영월로 각각 귀양 보내고, 조유례는 고신(告身)을 거두고 가두었다.

이러자 공포에 질린 단종은 그날 수양대군에게 선위를 했다. 하필 옥새는 예방승지 성삼문이 가져오는데 이 날 박팽년이 경회루 연못에 투신하려는 것을 성삼문이 막았다.

이어서 위패에는 맹인 지화 · 나가을두의 이름이 나온다. 맹인 지화는 계유년(1453, 단종1)에 안평대군을 위하여 운명을 점쳐서 망녕된 말을 하였다 하여 죽었고, 맹인 나가을두는 병자년(1456, 세조2)에 단종의 유모 봉보부인을 위하여 상왕의 복위를 점쳤다가 처형되었다.

이어서 이오(李午), 이오의 아들 내근(乃斤)ㆍ내철(乃鐵), 김소동, 별감 돌중(乭中)의 이름이 적혀 있다. 이들은 단종복위사건 관련자들이었다. 1456년(세조2)에 이오는 그의 아내 아가지(阿加之)와 상왕의 복위를 모의하고 명나라 사신에게 연회를 베풀던 날 내상고(內廂庫)의 칼을 가져다 몰래 돌중(乭中)에게 주어 권자신에게 건네주었다. 이 일들이 발각되어 모두 처형되었다.

다음은 반인(伴人) 김유덕, 김대정이다. 김유덕은 정효전의 반인으로서 정효전의 역모를 알고 있은 죄로 죽었고, 김대정은 안평대군이 난을 일으키자 성녕대군(1405∼1418 태종의 4남)의 집으로 피신하였는데, 성녕대군의 부인 성씨가 부인 옷을 입혀 병풍 뒤에 숨겨 준 것을 붙잡아다 목을 베었다.

이어서 전농시(典農寺) 노비 목효지, 정유재·범삼·석정·석구지·범윤, 순흥군사 황치 · 순흥군사 신극장의 이름이 적혀있다. 전농시 노비 목효지는 을해년(1455, 단종3)에 조유례 등과 함께 죽었고, 금성대군의 종 정유재 · 범삼 · 석정· 석구지 · 범윤 그리고 순흥 군사 황치와 신극장은 1457년(세조3)에 금성대군 사건이 발각되어 모두 연좌되어 죽었다.

다음으로 여인위(女人位) 위패를 본다. 여기에는 ‘여인위, 계유병자정축 사사인(死事人)지신(之神)’이라고 적혀 있고 그 옆에 궁녀(宮女) 자개, 궁비(宮婢) 아가지, 궁비(宮婢) 불덕, 무녀(巫女) 용안· 무녀(巫女) 내은덕· 무녀(巫女) 덕비 등 6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

궁녀(宮女) 자개(者介)는 내직(內職)의 상궁(尙宮) 박씨로, 헤빈 양씨의 최측근이다. 세종의 후궁이고 단종을 키운 혜빈 양씨가 궁중에서 축출되고 나서 단종을 그리워하며 궁녀 자개로 하여금 찾아보게 하였으나, 승지 강맹경이 아니 된다고 자개를 막았다. 궁녀 자개는 1455년(단종3)에 혜빈 양씨와 함께 죽었다.

궁비(宮婢) 아가지와 궁비 불덕은 1456년 6월 8일자 세조실록에 나오는 여인으로, 아가지는 노산군의 유모 봉보부인의 여종이었고 불덕은 권자신의 어미 집 여종으로 병자년(1456, 세조2)에 나가을두 등과 같이 죽었다. 무녀 내은덕(內隱德), 무녀 덕비(德非)도 능지처사되었다. (세조실록 1456년 6월 27일)

1) 환관위와 여인위의 자세한 내용들은 홍재전서 제60권 / 잡저(雜著) 7, 별단(別壇) 236인에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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