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어촌방송=김세곤 칼럼니스트] 9월12일에 창덕궁을 다시 방문했다. 9월 들어 두 번째 답사이다. 입구 돈화문에서 진선문, 그리고 숙장문을 지나니 희정당이 있다.

희정당 정문 앞에서 곧바로 바라보면 매점 겸 커피숍이 있다. 이곳은 3정승을 비롯한 당상관 등이 정무를 보던 빈청(賓廳)이었다. 커피숍 안으로 들어가니 동궐도와 빈청 관련 게시판이 있다.

사진=희정당 정문 앞에서 본 커피숍 (옛날 빈청이다)

 

사진=커피숍에 게시된 빈청 관련 글

1498년 7월12일에 연산군은 김일손을 빨리 친국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그는 전교하기를, "겸사복장(兼司僕將)에게 명해서 겸사복(兼司僕 국왕의 신변 보호와 왕궁 호위를 맡은 친위대) 등을 거느리고 건양문(建陽門) 밖으로 나가, 연영문(延英門) · 빈청(賓廳) 등지를 에워싸고 파수를 보면서 사람의 출입을 금지하도록 하라.” 하였다.

건양문(建陽門)은 창덕궁의 동남쪽 모서리에 있었던 창경궁으로 통하는 문이다. 지금의 검표소 근처이다.

사진=동궐도의 건양문, 연영문, 빈청의 위치

연영문(延英門)은 승정원(承政院)의 남문(南門)인데 현재는 없고, 주변이 소나무 뜰이다.

사진=창덕궁에서 창경궁으로 가는 검표소

“이윽고 의금부 낭청(郞廳) 홍사호가 김일손을 끌고 들어오자, 연산군은 의금부에 명하여 허반(許磐)을 잡아오게 하였다. 이때에 김일손은 호조정랑(戶曹正郞)으로 모친상을 당했는데, 상복(喪服)을 벗자 풍병이 생겨 청도군(淸道郡)에서 살고 있었으며, 허반은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로 관청에 있었다. 1)

상이 수문당(修文堂 희정당의 옛 이름) 앞문에 납시니 2), 윤필상·노사신·한치형·유자광·신수근과 주서(注書) 이희순이 입시하였다. 연산군은 김일손을 좌전(座前)으로 나오게 하고 친국하였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12일 2번째 기사)

 

사진=희정당 앞 뜰 (연산군이 김일손을 친국한 장소)

연산군이 전교하기를, "네가 『성종실록(成宗實錄)』에 세조조의 일을 기록했다는데, 바른 대로 말하라." 하였다.

김일손이 아뢰기를, "신이 어찌 감히 숨기오리까. 신이 듣자오니 ‘권귀인(權貴人)은 바로 덕종(德宗)의 후궁(後宮)이온데, 세조께서 일찍이 부르셨는데도 권씨가 분부를 받들지 아니했다.’ 하옵기로, 신은 이 사실을 썼습니다." 하였다. 3)

연산군의 첫 친국은 『성종실록』 편찬과 관련한 연산군의 증조부 세조 때의 일이었다. 김일손은 연산군이 ‘세조 조’의 일이라고 물었는데도 알아차리고 세조와 덕종의 후궁인 권귀인간에 있었던 일을 아뢰었다.

권귀인(종1품)은 세조(1417∼1468 재위 1455-1468년)의 큰 아들 의경세자(1437∼1457)의 후궁이다. 의경세자는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보위에 오르지 못하고 1457년 9월2일에 별세했다. 나이 20세였다. 그의 동생이던 예종(재위 1468-1469)이 세조의 뒤를 이어 19세에 왕위에 올랐으나 예종 역시 보위에 오른 지 1년2개월 만에 죽자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인 자산군이 13세에 임금이 되었다. 바로 성종(1457∼1494, 재위 1469-1494)이다. 성종은 즉위 후 아버지 의경세자를 덕종으로 추존하였다. 4)

그런데 김일손은 ‘세조가 며느리인 권귀인을 일찍이 부르셨는데도 권씨가 분부를 받들지 아니했다.’고 사초에 쓴 것이다. 이 일은 왕실에서 가장 숨기고 싶은 세조(시아버지)와 권귀인 (며느리)간의 궁금비사(宮禁秘事)였다.

연산군의 친국은 이어진다.

연산군 : "어떤 사람에게 들었느냐?"

김일손 : "전해들은 일은 사관(史官)이 모두 기록하게 되었기 때문에 신 역시 쓴 것입니다. 그 들은 곳을 하문하심은 부당한 듯하옵니다."

김일손은 사관에게 들은 곳을 묻는 것은 부당하다고 반박한다.

연산군 : "《실록》은 마땅히 직필(直筆)이라야 하는데, 어찌 망령되게 헛된 사실을 쓴단 말이냐. 들은 곳을 어서 바른 대로 말하라."

김일손 : "사관이 들은 곳을 만약 꼭 물으신다면 아마도 《실록》이 폐하게 될 것입니다.”

김일손, 당당하다. 죽을 각오를 하고 사관의 길을 말하고 있다.

연산군 : "그 쓴 것도 반드시 사정이 있을 것이고 소문 역시 들은 곳이 꼭 있을 것이니, 어서 빨리 말하라.”

김일손 : "옛 역사에 ‘이에 앞서[先是]라는 말도 있고, 처음에[初]’라는 말이 있으므로, 신이 또한 감히 선조(先朝)의 일을 쓴 것이오면, 그 들은 곳은 바로 귀인(貴人)의 조카 허반(許磐)이옵니다." 하였다.

김일손은 버티고 버티다가 권귀인의 조카 허반으로부터 권귀인의 일을 들었다고 실토한다. 5)

연산군 : "네가 출신(出身)한 지도 오래되지 않았는데, 세조의 일을 『성종실록』에 쓰려는 의도는 무엇이냐?“

세조와 권귀인의 일은 의경세자가 1457년 9월2일에 별세 후 상을 치른 뒤에 일어난 일이다. 1458년에 일어난 일이니 김일손(1464∼1498)으로서는 6살에 일어난 일이다. 1486년에 과거에 합격하여 출사한 것으로 말하면 28년 전의 일이었다. 이랬으니 연산군은 김일손에게 이 일을 사초에 쓴 의도를 물었던 것이다.

김일손 : "전해들은 일을 좌구명(左丘明) 이 모두 썼으므로 신도 또한 썼습니다."

좌구명은 공자가 편찬했다는 노나라의 역사 (BC 722-477) 『춘추(春秋)』를 상세하게 해설한 책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의 저자이다.

그는 풍부한 사료를 기반으로 하여 『춘추』책의 배후에 있는 사실들을 상세히 기술하고 춘추와 관계없는 전해들은 이야기도 많이 기술하였다. 그는 『춘추좌씨전』을 지으면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엄정한 평가(춘추필법)과, 공자의 의도가 드러나지 않은 미언(微言)과 미언의 행간에 감춰져 있는 공자의 기록 의도(大義)까지 해설했다. 즉 『춘추』의 간략한 사실에 추가하여 사건 전후의 배경, 야사까지도 상세히 적었다.

김일손은 이런 좌구명의 역사서술 방식을 본 따서 세조의 시대도 적었다고 진술했다.

1) 김일손은 1496년 2월에 사간원 헌납에서 호조좌랑으로 전보되었다.

권오복이 김일손에게 보낸 편지에도 나온다.(1498년 7월12일 3번째 기사) 한편 김일손은 사간원 헌납 시절에 사간원 연명으로 소릉 복위를 주청하였다.

2) 희정당(熙政堂)은 창덕궁이 창건되면서 지어진 건물인데 성종 때에는 숭문당(崇文堂 정사를 들을 뿐만 아니라 글을 닦는 의미) 또는 수문당(修文堂)이라 했다. (연산군일기 1496년 12월8일). 그런데 1496년 6월에 수문당에 화재가 나서 다시 지으면서 이름을 희정당 (정사에 빛을 비춘다는 의미)으로 고쳤다. (연산군일기 1496년 6월14일, 8월19일)

3) 허반은 7월15일에 ‘귀인 권씨가 의경세자의 상(喪)을 마치자 세조께서 명하여 고기를 권하였는데, 굳이 거절하고 먹지 않으므로 상이 노하니 권씨가 달아났다’고 진술했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15일)

한편 강겸은 권귀인을 절부(節婦)라고 공초했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14일)

4) 덕종은 왕위에 오르지 못한 사람에게 추존된 조선조 첫 번째 임금이 되었다.

5) 아마 연산군은 김일손의 주리를 틀었을 것이다. 실록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행간에서 읽을 수 있다.

저작권자 © 한국농어촌방송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