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어촌방송=김세곤 칼럼니스트] 연산군 시대에 삼사(三司)와 대신은 번번이 대립하였다. 1) 원래 대신과 삼사는 기능상 서로 긴장하는 관계였지만, 이 시기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삼사와 대신의 갈등은 1498년 12월 28일 연산군 즉위 전부터 수륙재(水陸齋)를 둘러싸고 일어났다. 삼사(三司)는 유교적인 의례가 아니라는 이유로 수륙재 실시에 반대했지만, 좌의정 노사신은 연산군의 의견에 힘을 실어주었고, 우의정 신승선(연산군의 장인)은 잠자코 말이 없다가 ‘나의 생각도 또한 노사신의 말과 같다.’고 말했다. (연산군일기 1494년 12월 28일 1번 째 기사)

사진=연산군 묘 입구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
사진=연산군 묘 안내문

이러자 대간은 정승들이 임금의 눈과 귀를 가린다고 탄핵했다. 1495년 1월4일에 우의정 신승선이 사직을 청했고, 1월22일에는 좌의정 노사신이 사직을 청했다. 2)

3월20일에 좌의정 노사신이 영의정이 되었다. 그런데 삼사는 4월부터 줄기차게 윤탕로의 국문을 강력히 요청하자, 6월29일에 연산군은 윤탕로를 사면하는 단자(單子)를 네 번이나 내려 보냈는데도 따르지 않은 대간을 국문하라고 전교했다. 이 때 노사신은 임금님의 하교가 지당하다고 하였다. (연산군일기 1495년 6월29일 1번째 기사)

7월7일에 대간들은 "전하께서 대간을 잡아 가두려고 정승에게 문의하시매, 정승이 대답하기를 ‘상교(上敎)가 지당하십니다.’ 하였으니, 이는 정승 된 도리를 잃었습니다.”라고 서계하였다.

이러자 영의정 노사신이 서계하였다.

"근래에 대간은 비록 작은 일일지라도 이기려고만 힘써서 주상과 논란을 벌이며, 날이 겹치고 달이 걸리더라도 꼭 이기고야 맙니다. 그러므로 그 폐단이 차츰 임금의 위엄이 떨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습니다.

신은 이 점을 항상 걱정하였으나 폐습을 고칠 방법이 없었는데, ‘근자에 대간이 명령을 거역하였으니, 잡아 가두라.’는 상교를 받자옵고, 신은 마음속으로 이는 실로 영걸한 임금의 위엄 있는 결단이라 여겨 경하하기에 겨를이 없었습니다. 무슨 연유로 이런 죄인들을 구원하겠습니까. 이것은 신의 진정이오니, 성상께서 재결하여 주소서."

(연산군일기 1495년 7월7일 2번째 기사)

대간에게 직격탄을 날린 노사신의 발언은 대단히 파격적이었다. 이러자 삼사는 노사신을 강력 규탄했다. 7월8일에 대사헌 최응현·대사간 이감 등은 노사신을 국문하라고 상소했다. 연산군은 듣지 않았다. (연산군일기 1495년 7월 8일 4번 째 기사)

이 날의 실록에 사관은 아래와 같은 사평(史評)을 적었다.

“노사신이 영의정으로서 ‘대간의 항론(抗論)은 임금의 위엄을 떨치지 못하게 하는 것이요, 대간을 잡아 가둔 것은 영걸한 임금의 위엄 있는 결단(威斷)이 되는 것입니다.’고 하여, 마침내 간언하는 신하를 거의 다 죽이는 지경까지 이르렀으니, 노사신이 그르쳐 놓은 것이다.”

7월11일에 대간이 합사(合司)하여 노사신을 국문하라고 아뢰었고, 7월12일에도 삼사는 노사신이 직언을 막으려 한다고 국문을 청했으나 연산군은 듣지 않았다. 7월13일과 14일에도 삼사는 노사신을 탄핵하면서 노사신을 중국의 간신 조고에 견주면서 나라를 망칠 간웅으로 몰았다.

7월15일에도 홍문관은 노사신을 비난했다.

“노사신은 대간이 논쟁을 벌이는 것을 근심으로 여기고, 대간이 옥에 갇힌 것을 기쁨으로 삼으니, 그 근심 그 기쁨이 크게 사람의 본성에 어긋났으므로 재앙과 해독이 제 몸에 미치는 정도로 그치지 않고 반드시 국가를 망치게 하고야 말 것이니, 두려운 일입니다.”

(연산군일기 1495년 7월 15일 1번째 기사)

7월16일에는 대간과 홍문관이 노사신을 극론했으나 연산군이 듣지 않자 자신들을 파직시켜 달라고 청했다.

이어서 홍문관은 노사신을 나라 망치는 신하로 서계하였다.

"나라를 망칠 노사신의 말은 신들만이 놀라워한 것이 아닌데 도리어 옳게 여기시니, 웬일이십니까? ... 노사신의 말이 한 번 행해지면 위에는 귀먹고 아래에는 막혀서 나랏일이 날로 글러져 장차 구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것이니, 나중에 뉘우쳐도 소용없을 것입니다."

(연산군일기 1495년 7월16일 2번째 기사)

7월17일에도 홍문관은 노사신의 간사함을 극력 아뢰고, "노사신을 국문하지 않으실진대 신들을 파직하소서, 신들은 노사신과 더불어 양립(兩立)할 수 없습니다." 하였으나 연산군은 듣지 않았다.

이 날 예문관 봉교 기저, 권달수 등이 노사신을 처단하기를 상소했다

"엎드려 아뢰옵니다. 임금과 신하의 사이는 사람의 한 몸과 같아서, 임금은 우두머리라면 삼공(三公)과 육경(六卿)은 팔·다리·가슴·등이요, 대간·시종은 귀와 눈이요, 내외 여러 유사(有司)는 근기(筋肌)·지절(支節)·혈맥인 것입니다. 사람의 몸이 맥박 하나만 좋지 않으면 병이 되고, 임금의 나라가 관리 하나만 잘못 등용하면 나라가 병드는데, 하물며 삼공(三公)임에리까. 삼공이란 만기(萬機)를 돕고 백관들을 거느려서, 한 나라의 우러러 바라보는 바요 모든 관원의 사표가 되는 것인데, 불행히 음흉하고 간사한 소인이 그 지위에 앉게 되면 백관(百官)이 해체되는 동시에 국사의 쇠란(衰亂)이 따를 것이니, 두렵지 않겠습니까.

(중략) 영의정 노사신은 본시 하나의 음험하고 간사한 소인으로 4대의 조정을 내리 섬겨 국가의 대신이 되었는데, 전하께서 즉위하시게 되매 권세를 농간해서 제 마음대로 휘두를 계획을 하여 조종(祖宗) 만세의 기업(基業)을 그르치고자 하니, 이는 종묘사직의 죄인입니다.

(중략) 신들이 또 듣자오니, 노사신이 대간으로부터 자기를 국문하기를 청하는 것을 보고는 감히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어떻게 나를 국문하겠느냐? 국문을 한다면 나로서도 할 말이 있다.’고 하니, 노사신이 이미 나라 망칠 말로써 전하께 아유하였는데, 다시 또 무슨 말을 꾸며 대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중략) 지금 대간과 시종이 여러 달을 두고 궐문 앞에 엎드려 있어도 아직 윤허하심을 입지 못하오니 (중략) 소인으로 임금을 우롱하는 그 술법도 역시 많았지만, 노사신처럼 기탄없는 자는 있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신들이 더욱 통분히 여기는 까닭이니, 바라옵건대, 전하께서 부디 유념해 주소서." (연산군일기 1495년7월17일 3번째 기사)

이러함에도 연산군이 노사신을 비호하는 전교를 내리자 대간들은 자신들을 파직시켜 달라고 청했다.

“전하께서는 그가 훈구(勳舊)의 신하인데 어찌 말 한 마디 실수로써 죄줄 수 있느냐.’ 하시지만, 예로부터 나라를 그르치는 간흉은 항상 국권을 맡은 대신의 열에서 나오는 것인데, 어찌 대신이라 해서 용서하고, 그 소위를 들어 주어 그 간사한 꾀를 성립시키게 할 수 있습니까. 전하께서 들어 주지 않으시니, 이는 신들이 용렬한 소치입니다. 신들을 파직시켜 공의에 답하소서.”

7월18일에 홍문관이 노사신의 간교함을 서계했다.

"지난날에는 대간이 노사신이 사심을 끼고 있다고 논하여도 사직을 청하기도 하더니, 지금은 온 조정이 논쟁을 벌여 탄핵한 지 이미 오래인데 노사신이 태연하니 그 정상을 알 만합니다. 전하의 전교에 비록 바르다고 하셨지만, 이는 위로 전하를 두려워하지 않고, 아래로 조정을 업신여기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연산군은 그른 점이 없다면서 듣지 않았다

"반복하여 생각해 보아도, 노사신의 그른 점을 알지 못하겠다."

이렇게 삼사는 연일 영의정 노사신을 집요하게 탄핵했다. 그러나 연산군은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3)

사진=연산군 묘 배치도
사진=연산군과 거창군 부인 신씨 묘

1) 삼사는 사헌부 · 사간원 · 홍문관을 말한다.

2) 노사신(1427∽1498)은 명망 있는 가문의 후예였다. 그의 조부는 세종 때 우의정을 한 노한이고 부친은 동지돈녕부사를 한 노물재였다. 노사신은 단종 1년(1453)에 급제한 뒤 성종 때는 좌 · 우찬성을 역임하고 연산군 즉위 시 좌의정이었다.

3) 김범 지음, 연산군 - 그 인간과 시대의 내면, 글항아리, 2010,

p 118-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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