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어촌방송=김세곤 칼럼니스트] 1477년(성종 8년) 7월14일에 성종은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대사헌 김영유가 아뢰었다.

"사헌부에서 명(命)을 받아 홍귀달·손순효를 추국하였더니, 마땅히 잘못 했다고 해야 하는데 오히려 스스로 옳다하고는 답변서에는 불손(不遜)한 말이 많습니다. 이들이 신출내기 선비도 아닌데 불손함이 이와 같습니다. 한한은 홍귀달이 논계할 때를 당하여 책임을 느끼고 중지시키지 못하였으니, 청탁이 명백합니다."

성종이 말했다.

"어찌 청탁하는 것을 들어 주었겠는가? 조식이 무고한 것은 오로지 김주를 내치고 그 누이의 재산을 모조리 강제로 차지하려고 한 것뿐이다. 내가 들으니 조식등은 일찍이 그 누이를 때리고 다리를 몇 번 분질렀다 하니, 마땅히 샅샅이 추국하여 그 죄를 바르게 하려는데 경(卿)등의 생각은 어떠한가?"

이러자 영사(領事) 심회·김국광이 대답했다.

"조식의 무리는 형문함이 마땅하며, 홍귀달이 아뢴 것은 그릇되었습니다."

성종이 도승지 현석규에게 누가 먼저 발설하였느냐고 물었다.

현석규는 손순효·홍귀달이 먼저 발설하였다고 대답했다.

이어서 사헌부에서 아뢰었다.

"조씨(趙氏)는 여러 해를 과부로 살았고, 부모가 모두 죽었으며, 빈궁(貧窮)하기가 더욱 심하였는데도 조식·송호는 그녀를 챙겨주기는커녕 노비를 빼앗았습니다.

김주는 비록 예(禮)에 어긋나는 혼인을 도모하였더라도 본시 강간이 아니거늘, 조식 등은 소장을 내어 무고(誣告)하였고, 송호는 집안의 노비로 하여금 김주의 두발을 손으로 움켜쥐고 휘두르게 하고, 족심(足心 : 발바닥의 한가운데 오목하게 들어간 곳)을 때리게 하는 등 구타가 명백합니다.

이러한즉 조식 · 송호를 형문하고 추국함이 마땅하거늘, 홍귀달이 반박하여 아뢰었음은 잘못이거는, 그는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답변서에서 답하기를, ‘조식 등이 강간을 고발한 것은 천성(天性)의 발로(發露)이고 일호(一毫)도 사사로운 거짓이 없다.’하였습니다.

또 손순효는 답변서에서, ‘조씨는 본시 대대로 녹(祿)을 받는 집안의 부녀인데, 김주가 조씨의 족친과 더불어 혼인을 도모하지 않고, 하루 저녁에 마구 뛰어 들어가 간음을 행하니 조식이 놀래어 강간으로 고발하였음은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라고 말하여, 그 언사가 붕당을 지어 자기편을 두둔하고 자못 불손하였습니다.

송호의 아비 송익손도 현석규에게 청탁하였고, 한한은 송호의 친척으로 연좌됨이 확연하며, 이극기·임사홍도 또한 의논하는데 참여하고 그 한한의 청촉을 들어줌이 명백하니, 청컨대 아울러 추국(推鞫)하소서."

이에 성종이 전교하였다.

"이극기·임사홍은 추국하지 말고, 한한·손순효·홍귀달은 의금부에 이송하라." (성종실록 1477년 7월 14일 2번째 기사)

7월15일에 의금부에서 아뢰었다.

"홍귀달·손순효가 조식·송호의 일을 논계한 것은 사사로운 청탁인데도 승복하지 않으니, 청컨대 형문(刑問)하여 죄상을 밝히소서."

이에 성종이 전교하였다. "비록 엄호(掩護)하지 않았더라도 또한 죄가 있으니, 율(律)을 따라 추국하여 아뢰라." (성종실록 1477년 7월 15일 2번째 기사)

7월16일에 의금부에서 아뢰었다.

"동부승지 홍귀달, 우부승지 손순효의 답서는 번문불손죄[煩文不遜罪 번거로운 글과 불손을 저지른 죄]로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 임금의 교지(敎旨)를 위반하는 죄를 다스리는 율)에 의거하여, 결장(決杖) 1백 대에, 고신(告身)을 추탈(追奪)하소서."

하지만 성종은 어서(御書)를 내려 "홍귀달만 고신(告身)을 거두고, 손순효는 교수(敎授)로 도로 근무하게 하라."고 하였다. (성종실록 1477년 7월16일 2번째 기사)

7월17일에 사헌부 대사헌 김영유 등이 차자(箚子 간단한 보고서)를 올렸다.

"신 등이 엎드려 듣건대, 한한은 방면(放免)하고, 손순효는 교수(敎授)로, 홍귀달은 고신(告身)만 거두었다고 합니다. 당초에 의논하여 입계(入啓)하였을 때에, 홍귀달이 한한과 자리를 함께 하였는데 그 일이 청탁에 관계된 것입니다. 옥사는 비록 끝나지 아니하였더라도 정상은 엄폐하기가 어렵습니다. 전교를 받고 추문(推問)할 때에 미쳐서는 홍귀달과 손순효는 의논이 서로 부합되고 언사(言辭)가 불손하여, 그 정상을 보건대 분명히 경중(輕重)이 없으니, 청탁한 정상을 논(論)한다면 홍귀달과 한한은 동죄(同罪)이고, 불손한 정상을 논한다면 손순효와 홍귀달은 동과(同科)이니, 다시 중죄(重罪)를 내려주기를 청합니다."

성종은 다시 어서(御書)를 내렸다.

"한한은 청탁하지 않은 까닭으로 방면하고, 손순효와 홍귀달은 언사(言辭)가 같은 것 같지만 실제는 다르니, 동일한 율(律)로써 다스리기는 불가하다." (성종실록 1477년 7월17일 3번째 기사)

이 날 의금부에서 조식 등의 처벌에 대해 아뢰었다.

"이심(李諶)의 처 조씨(趙氏)가 족친(族親)으로 하여금 혼인을 하려하지 않고, 스스로 중매하여 김주에게 시집간 죄와 김주가 조씨에게 예(禮)를 갖추지 않고 장가든 죄는 《대명률(大明律)》을 보니 ‘화간(和奸)한 자는 장(杖) 80대를 처한다.’ 하였으니, 남녀(男女)를 한가지로 죄주어 이혼하게 하소서.

또한 조식·송호·조진(趙軫)이 조씨의 전민(田民)을 나누어 점거하려고 모의하고, 김주를 강간으로 무고한 죄는, 조진은 수범(首犯)이 되니 장(杖) 1백 대에, 유배 3천 리(里)를, 조식·송호는 종범(從犯)이 되니 장(杖) 1백 대에 고된 노동을 시키는 형벌 3년을 처하되, 아울러 고신(告身)을 모두 추탈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한편 조씨(趙氏)·조진·조식·송호는 돈을 바치고 장형(杖刑)을 면제받았다.

(성종실록 1477년 7월17일 5번째 기사)

 

 

사진= 자계서원 안내판 (경북 청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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