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어촌방송=최양부 바른협동조합실천운동본부 이사장] 조합원 28, 출자금 28파운드로 시작한 로치데일 협동조합은 이듬해인 1845년에는 조합원이 74명으로 늘었으며 출자금은 181파운드로 늘었고, 10년이 지난 1856년에는 1,600명으로, 출자금도 12,920파운드로 확대되었다.

매장사업은 1844년 시작 당시에는 버터, 설탕, 밀가루, 오트밀, 수지 양초 등 5개 생필품이었으나 차츰 육류(1846), 의류(1847), 제화(1852) 등으로 확대되었다.

사업영역도 확대되어 1850년에는 조합원 90명이 참여하는 옥수수 제분 조합을 만들어 제분소(1856)을 설립 운영하였고, 1854년에는 제조업 생산조합을 만들어 방적과 모직물생산을 시작했다. 1959년까지 6개의 지점을 개설했고 1875년까지 16개 지점이 생겨났다.

소매업을 하는 매장이 증가하고 판매물량이 증가하면서 판매 상품을 도매로 구입하는 문제가 제기되면서 1856년부터 지역의 협동조합들을 위한 도매업에 진출하기 시작했고 1863년에는 지역 협동조합이 참여하는 연합조직으로 도매협동조합(Cooperative Wholesale Society, CWS)의 설립을 주도하였다.

소매협동조합의 1878~9년 조사에 따르면 영국에는 1,200여 개의 조합이 있었으며 이 가운데 584개 조합이 CWS와 연합하고 있었다고 한다. 1867년에 질병 장례조합, 주택조합, 보험회사 등을 설립했다.

로치데일 공정선구자협동조합의 확대발전 (1844-1863)
로치데일 공정선구자협동조합의 확대발전 (1844-1863)

1876년에는 조합원은 8,892명으로 늘어났으며, 50,668파운드의 수익을 냈다고 한다. 로치데일 협동조합은 매장사업에서 제조업, 도매업, 주택, 교육 등의 새로운 분야로 사업영역을 확대하면서 협동조합과 자회사를 설립하였다.

지역사회의 주요한 금융, 교육기관이 실패하면서 문을 닫자 이들을 인수 합병하는 등 수직적, 수평적 통합을 통해 로치데일 협동조합은 1850-60년대 로치데일의 주요 거점 역할을 하는 사회경제 및 교육기관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로치데일은 조합원들의 지적 능력향상을 위해 교육사업에 심혈을 쏟았다. 조합원에 대한 교육은 단순히 협동조합론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과학에서 경제학, 인문학에 이르는 조합원의 삶의 질의 향상에 미치는 모든 주제를 망라했다고 한다.

로치데일 협동조합의 성공적 정착은 협동조합도 작동한다는 신념을 확산시키면서 협동조합을 사회경제적 기관으로 자리 잡게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로치데일은 협동조합을 지도하는 협동조합의 모델이 되었으며 협동조합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협동조합에 대한 철학과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브렛 페어바이든)

(자료: 정광민, “로치데일 공정 선구자 협동조합: 역사와 사람들,” 7차 바협 세미나 발표원고, ) 바른협동조합 실천운동본부, 2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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