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BS역사칼럼-길 위의 역사] (2부 무오사화) - 55회 연산군, 임희재와 그 아비 임사홍을 국문하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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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S역사칼럼-길 위의 역사] (2부 무오사화) - 55회 연산군, 임희재와 그 아비 임사홍을 국문하라하다.
  • 김세곤 칼럼니스트
  • 승인 2019.08.26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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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어촌방송=김세곤 칼럼니스트] 1498년(연산군 4년) 7월13일에 연산군은 『실록』 열람에 대하여 전교하였다.

“홍문관·예문관에서 『실록』을 보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였는데, 평시라면 이 말이 타당하다. 그러나 지금 큰일을 상고하려고 하는데 완강히 불가하다고 하니, 이는 반드시 어떤 사정(事情)이 있어서다. 의금부에 내리어 국문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러자 대간(臺諫 사헌부와 사간원)이 합사(合司)하여 아뢰기를,

“예로부터 임금은 사초(史草)를 보아서는 아니 됩니다. 홍문관·예문관은 직책이 사관(史官)을 겸대하였으므로 주상께서 사초를 보시지 못하게 하는 것이 바로 그 직분이오니 국문은 온당치 않습니다.” 하였다.

그러나 연산군은 듣지 않았다.(연산군일기 1498년 7월13일 4번째 기사)

그랬다. 실록과 사초를 담당한 춘추관의 관직은 예문관 · 홍문관 관원이 겸직하였으니 이들이 실록을 보라고 할 리 없었다.

연산군은 예문관 · 홍문관의 행동에는 “반드시 어떤 사정(事情)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은 김일손의 사건을 확대하려는 의도가 보인다. 실제로 사초 사건은 며칠 후 실체가 드러나면서 더욱 확대되었다. (김범, <사화와 반정의 시대>, 역사의 아침, 2015, p 110)

7월14일에 대간이 아뢰기를, “홍문관·예문관 관원을 가두고 국문하는 것은 부당하옵니다.”하였으나, 연산군은 역시 듣지 않았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14일 1번째 기사)

연산군 묘
연산군 묘
연산군 묘 안내판
연산군 묘 안내판

이어서 연산군은 사초 사건에 관련된 자들을 잡아올 때는 그 집의 문서까지 수색하라고 명령했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14일 4번째 기사)

이러자 의금부는 이목(李穆1471∼1498)의 집을 수색하여 임희재(任熙載1472~1504)가 이목에게 준 편지를 발견했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14일 5번째 기사)

임희재는 조선시대 간신의 대명사 임사홍(1445∼1506)의 둘째 아들인데, 정석견, 강혼, 강백진, 권오복, 김굉필과 함께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이다. 점필재 김종직(1431∽1492)의 문인으로 이목과 교류가 있었다.

그러면 임희재의 편지를 읽어보자.

“저는 우생(友生)이 없어 빈집에 홀로 누워 세상의 허다한 일만 보고 있습니다. 들으니, 그대가 장돈(章惇)의 아들 장전(章銓)을 잘못 거슬려서 성내게 했다는데 과연 그러한가? 지금 물론(物論 여러 사람의 논의나 세상의 평판)이 심히 극성스러워 착한 사람(善人)이 모두 가버리니, 누가 그대를 구원하겠는가? 부디 시(詩)를 짓지 말고 또 사람을 방문하지 마오. 지금 세상에 성명을 보전하기가 어렵습니다.

근일(近日)에 정석견이 동지성균(同知成均)에서 파직되었고, 강혼은 사직장을 올려 하동의 원님이 되었고, 강백진은 사직장을 올려 의령의 원님이 되었고, 권오복도 장차 사직을 올려 수령이나 도사(都事)가 될 모양이며, 김굉필도 이미 사직장을 내고 시골로 떠났으니, 그밖에도 많지만 다 들 수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철견 · 윤탄이 의금부지사(義禁府知事)가 되었는데, 논간(論諫)을 해도 임금이 듣지 않으니, 어찌 하겠소.

요사이 종루(鐘樓)에 이극돈의 탐취(貪聚)한 사실을 방(榜)을 써서 붙였으니, 저도 또한 수경(數頃)의 전토를 충주·여주의 지경이나 혹 금양(衿陽)의 강상(江上)에 얻어 수십 년 남은 생애를 보내고 다시 인간 세상에 뜻을 두지 않을까 하니, 그대도 다시 올라올 생각을 하지 말고 공주(公州)의 한 백성이 되어 국가를 정세(丁稅)로써 돕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임희재의 편지를 읽은 연산군은 “그 아비 임사홍이 소인(小人)으로서 금고를 입었는데, 이 사람도 역시 그렇단 말이냐. 아울러 그 아비까지 잡아다가 국문하라.”고 전교하였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14일 6번째 기사)

임희재의 편지에 ‘공주의 한 백성이 되라’는 내용이 나오는 것을 보니 임희재가 이목이 공주에 유배중일 때 보낸 편지이다. 이목은 1495년 1월에 성균관 유생 신분으로 연산군이 수륙재를 올리는 것을 반대하였다가 1월27일에 공주로 유배 갔다.

 임희재 역시 성균관 유생 신분으로 이목 등과 함께 수륙재를 반대했다가 1월27일에 정거(停擧 과거시험 정지)당했는데, 5월22일에 임희재는 정거가 풀렸고, 이목은 유배가 풀리고 정거(停擧)로 감형되었다. (연산군일기 1495년 5월22일 2번째 기사)

여기에서 유심히 살펴볼 것은 ‘무오사화를 1498년 김일손 등 신진사류가 유자광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에 의해 화를 입은 사건’으로 정의하는 것이 통설인데(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대표적 훈구파로 분류되는 임사홍의 둘째아들 임희재가 무오사화에 깊이 연루된 사실은 이 통설에 허점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임희재는 무오사화로 곤장 100대를 맞고 유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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