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손의 상소는 계속된다.

“『상서(尙書, 서경(書經)의 별칭)』에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면 두려운 데에 들게 된다.’ 하였습니다. 여러 신하가 전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전하께서는 반드시 노하여 죄주실 것이거니와, 만약 전하께서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으신다면 하늘이 어찌 전하를 돌보겠습니까.

여러 신하가 전하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전하께서는 하늘을 두려워하시어 멀다 하지 마소서. 하늘을 두려워한 뒤에야 만사가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김일손은 연산군에게 하늘을 두려워하라고 간언한다.

한 번 하늘의 도(天道)를 멀다 하시면 하늘을 업신여기는 마음이 생기고, 하늘을 업신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만물을 맡아보면 이 마음이 방자 하여져서 막을 수 없을 것이니, 여러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가 전하의 몸 아래에 물건인데, 두려울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이렇게 되면 대신을 공경할 필요가 없고 대간(臺諫)을 믿을 필요가 없으며, 시종(侍從)을 친근하게 대하지 않고 ‘내 말은 어기지 못한다.’, ‘내 명은 거슬리지 못한다.’하시면, 내가 잘 낫다는 마음이 날로 쌓이고 달로 자라나서 다시는 용납해 받아들이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현인과 군자는 머뭇거리며 속으로만 아파하고 다시는 진언(進言)하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그러니 전하께서는 어찌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늘을 두려워하면 마음이 바르게 될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하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뭇 신하에 임하시고, 또한 하늘을 본받아서 전하의 마음을 비우소서. 오직 마음이 비워야 사물을 받아들일 수 있으니, 진실로 주일(主一 : 마음을 오로지하여 잡된 것을 들이지 않음.)하여 마음을 비우신다면, 마음이 하늘과 통하여 탕탕(蕩蕩) 평평(平平)한 중정(中正)의 도(道)가 점점 이루어져서 제왕의 법도가 세워질 것입니다.

중정(中正)의 도라. 지나치게 모자람이 없으며 치우침이 없는 곧고 올바른 도를 행하는 것이 바로 치국의 길이다.

상소는 이어진다.

“만약에 마음을 비우지 않으신다면, 대신에게 정사를 맡길 적에 그가 총애를 믿고 권세를 휘두르지 않을까 의심하여 간섭하고, 대간을 대우하는 데는 그가 명예에 마음을 두고 책임만 면하려 한다고 의심하여 물리치고, 청론(淸論 : 맑은 말과 고상한 논의)을 들으면 그것이 너무 옛것에 얽매어 실정에 맞지 않는다고 의심하여 가볍게 여기며, 전조(銓曹)에서 사람을 쓰는 데는 제 사정(私情)을 따르는 가 의심하고, 형관(刑官)이 법을 다루는 데는 사정(私情)을 쓰는 가 의심하게까지 되어, 여러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가 사정이 있다고 의심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전하의 마음은 날로 고달파지고 신하들은 의사를 펴지 못 할 것입니다. 한 선제(漢 宣帝)와 당 선종(唐 宣宗)은 명목과 실제의 핵심을 파악하고 대권을 모조리 장악하여 명찰(明察)한 임금이라 칭송받았으나 지덕(至德)은 아니었습니다.

오직 사람을 알아보아서 잘 맡기고 인재 얻기를 잘하며, 마음을 비워 간하는 말을 잘 받아들이는 것이 곧 임금 된 이의 훌륭한 절제(節制)입니다.”

임금이 사람을 믿고 일을 맡기고 인재 얻기를 잘하며, 간언을 잘 받아들이는 것이 임금의 훌륭한 절제(節制)라는 김일손의 상소는 지금도 되새길 만하다.

“전하께서 세자로 계실 때는 한 마디 말씀도 실수가 없으시고 한 가지 행실도 이지러짐이 없으셨으므로, 숨긴 덕과 감춘 빛을 남들이 추측할 수 없었으며, 즉위하시어서는 집상(執喪)을 애통하게 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되게 하고 첫 정사를 밝게 시행하여, 여러 사람의 마음을 깨우쳤습니다.

안팎의 신하 백성들은 한 집안의 오랜 종들과 같아서 가장(家長)이 살았을 때에는 그 아들이 마음대로 처리하는 법이 없으므로 그의 뜻이 어떠한지 몰랐으나, 가장을 잃고 나서는 당황하여 우러러 의지할 곳이 없어서, 문득 상속한 맏아들의 행동이 법도에 맞는가를 보아 기뻐도 하고 슬퍼도 합니다. 다행히 가업이 더욱 융성하면 서로 경축하고 칭송함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이에 한마디 말씀과 동작 하나하나의 관계됨이 무거우니, 전하께서 삼가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집안의 가장처럼 한 나라를 이끌 임금 노릇의 막중함을 다시금 강조하고 있다.

“삼년상(三年喪)은 천자(天子)부터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공통된 것이라, 어찌 귀천의 다름이 있겠습니까. 처음 초상을 당해서는 목소리는 다시 못 들어도 유체(遺體)가 상(床)위에 있으니 그래도 붙들고 울 수가 있으나, 염(斂)하게 되어서는 모습마저 한 나무관 속에 거두니 애간장을 찢듯이 망극함을 어찌하겠습니까. 초빈(草殯)하게 되어서는 그일이 아득해지되 오히려 평일에 거처하던 곳에서 아침 저녁으로 곡림(哭臨)하여 생시처럼 봉양하니, 또한 스스로 위안할 만하나, 장사하게 되어서는 어둡고 어두운 구덩이 속에 아주 묻으니 울부짖어 봐도 미칠 수 없으니 영원히 버린 것이며, 이에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버이를 잃은 자는 3년이 지나고서는 상복을 다시 더 입어 볼 수 없음을 생각하고, 장사하고 나서는 빈소에 계실 때를 생각하고, 빈하고 나서는 염하지 않았을 때를 생각하고, 염하고 나서는 편찮았을 때를 생각하나, 일이 때와 더불어 지나가서 날로 멀어지매 소급할 수 없는 것입니다.

김일손 부친 남계공 김맹(1410∽1483)의 묘소 (경북 청도군  김일손 묘 위에 있다) (사진=심세곤)
김일손 부친 남계공 김맹(1410∽1483)의 묘소 (경북 청도군 김일손 묘 위에 있다) (사진=김세곤)
영모재 (사진=김세곤)
영모제 (사진=김세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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