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손의 상소 26개 조목 중 7번째 조목은 ‘시신(侍臣)이 조칙을 봉환(封還 도로 돌려드림)하고 논박할 수 있어야 합니다.’이다.

당나라에 때부터 한림(翰林)이 내명(內命)을 맡고 급사(給舍)가 외제[外制]을 맡아서 무릇 임명과 파면이 있을 때에 모두 제사(制詞: 임·면하는 사연을 적은 글월)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한림이나 급사가 다 같이 조칙을 봉박(封駁)할 수 있으니, 한림은 내전(內殿)에 두어서 임금을 따라 옮겼고, 급사는 중서문하(中書門下)에 두었던 것인데, 전조(前朝)에서는 문하부(門下府)에 두었었고, 본조(本朝)에 들어와서는 의정부에 두었다가 그 다음에 분리해서 별도로 둔 것입니다. 대개 당시에 서무는 의정부에서 처리하였으나 간원을 붙이게 된 것은 곧 옛적에 급사를 중서문하에 두었던 의미입니다. 지금에 와서 옛것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이 선조(先朝)에 있을 때에 연경(燕京)에 가서 대명백관도(大明百官圖)를 살펴보았더니, 육과급사중(六科給事中)은 낮은 7품 벼슬로도 맡은 임무는 우리 조정의 여섯 승지와 같아서 어가[鸞駕]를 인도하고 어명을 출납하고, 혹시 임금에게 잘못이 있으면 논박하여 아뢰고, 혹 뜰에 내려서서 간하기도 하였으니, 이것은 가까이 모셨기 때문에 일을 보고 겪는 것이 빨라서 금하지 못할 것도 금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승정원은 서정을 관할하고 있으니, 권리는 상서성(尙書省)과 같습니다. 그래서 상서랑(尙書郞)도 또한 논박할 수 있는데, 오늘날 사간원이나 사헌부는 이름은 시종신(侍從臣)이라고 하지만 외관(外官)과 같은 청사에 있으면서 겨우 서리(胥吏)들의 문견 기록을 얻어 보고, 이미 완성된 명령이 내려진 뒤에 비로소 논박하니 이미 때가 늦습니다.

홍문관은 곧 옛날 한원(翰苑)인데, 비록 혹 일을 논하더라도 논박할 만한 사두(詞頭 조정에서 사신(詞臣)에게 조칙을 기초하도록 명할 때 주는 요지)가 없고, 다만 감사(監司)에게 내리는 교서나 지을 뿐이요, 명령을 이행하지 않고 도로 바치는 전례도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조정의 시신은 임금의 실수를 바로잡을 수 없을 것입니다.

신은 원컨대, 승정원이 모두 대사간을 겸직하고 상서랑의 권리를 가지고 급사중(給事中)의 책임을 맡도록 해서 교령을 짓고 봉박하는 책임을 수행하도록 한다면 임금의 직임에 있어서 매우 다행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만약 ‘지당합니다.’하고 다만 문서처리나 할 뿐이라면 서리 한 사람으로도 족할 것입니다. 순임금이 대언(代言 승지)에게 명할 때에는 반드시 일러 주기를 ‘짐의 명령 출납(出納)은 오로지 신실(信實)하여야 한다.’고 하였으니, 이른바 신실하여야 한다는 것은 그저 출납만 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여덟째, 종실의 어진 사람도 뽑아 등용해야 합니다.

대저 하늘이 인재를 내는 데 수(數)가 있습니다. 옛날에는 사람을 쓰는 데 오직 그 재주와 현명함만 보았고, 가깝고 멀고 귀하고 천한 것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땅이 비좁아서 인재가 나는 것이 한정이 있는데, 뽑는 데는 갈래가 많고 쓰는 데는 빼놓는 것이 많습니다. 서얼(庶孽)이면 쓰지 않고 재가(再嫁)하여 낳은 자식도 쓰지 않으니, 설사 뛰어난 인재가 있어서 중국의 주의(周顗)·범중엄(范仲淹)·조여우(趙汝愚) 같은 무리가 그 가운데 태어났어도 역시 뜻을 펴 볼 길이 없을 것이니, 다른 것은 논할 것도 없습니다. ‘종자(宗子)는 오직 성(城)이다.’라고 한 시인이 말 한 바 있습니다. 우리 세조께서 또한 종실에서 많이 채용하셔서 백관들 사이에 두었으니, 지금이라도 먼 친척 중에 어진 사람을 뽑아서 조정 반열에 참가시켜 쓴다면 또한 해롭지 않을 것입니다. 전한(前漢)은 동성(同姓)을 많이 봉해서 오래 유지하였고, 조위(曹魏)는 골육(骨肉)을 소박하여서 빨리 망하였으니, 모두가 경계할 만한 일입니다.

아홉 번째 사관(史官)을 더 두어 선악(善惡)을 기록할 것입니다.

국가의 사관으로 조정에는 홍문관·승정원·예문관과 육조에 각기 한 사람씩 두었으니 많지 않은 것은 아니나, 모두가 중앙에만 있기 때문에 지방의 풍속이 나쁘고 좋음과 인물이 잘나고 못난 점을 기록할 수 없으니, 악한 것은 기록하지 못하여도 탈될 것은 없으나, 선한 것이 행여나 빠진다면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 동방 선비가 사장(詞章)이나 읽기를 즐기고 뜻을 세우는 데는 스스로 힘쓰지 않아서 비록 관가의 일로써 독촉해도 오히려 힘쓰지 않으니, 초야(草野)에 묻혀 살면서 손성(孫盛 중국 진(晉)나라 사학자)처럼 역사를 집필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조(前朝)의 역사는 난잡하여 볼 만한 것이 못되고, 선왕의 실록도 필경 훌륭한 사실이 일이 많이 빠졌을 것입니다.

신은 원하옵건대, 각 지방의 막료(幕僚)에게 춘추관을 예겸(例兼 으레 겸임하도록 되어 있는 벼슬)하도록 하고, 수령(守令)에게도 학문이 넉넉한 자는 춘추관을 겸임토록 하여서 기재할 책무를 맡기고, 한 번 춘추관을 겸하였으면 비록 파면된 뒤라도 들은 것을 계속 기재하도록 함으로써 자신의 직무를 삼도록 한다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자계서원 전경(경북 청도군) (사진=김세곤)
자계서원 전경(경북 청도군) (사진=김세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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