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우칼럼서울디지털대학교 부동산학과 전 학부장
정용우칼럼서울디지털대학교 부동산학과 전 학부장

[한국농어촌방송/경남=정용우 서울디지털대학교 부동산학과 객원교수(전 학부장)] 겨울은 추워야 제맛이라고 하지만 올해 겨울은 여느 해처럼 모질게 춥지 않아 추위를 심하게 타는 나 같은 사람이 지내기에는 그저 그만이다.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쌀쌀하다가도 햇빛이 주변을 비추어낼 때면 몸과 마음이 따뜻해지면서 어디론가 걷고 싶어진다. 들판으로 갈까 산으로 갈까 잠깐 망설이다가 이내 산으로 발길을 옮긴다. 산이래야 동네 뒷산이다. 설날이 지난 지 며칠 되지 않았으니 다른 사람들이 즐겨하는 새해맞이 등산에는 미치지 못할지라도 나름 의미가 없지는 않을 성 싶다.

산에 올라 숲속의 낙엽 위에 앉아 본다. 멀리 서북쪽으로 남강이 흐르는 것이 보이고 앞으로는 금평들이 훤히 내려 보인다. 주변은 리기다소나무와 대나무 등이 제법 너른 숲을 형성하고 있다. 숲속에 앉아 이 숲을 이루는 구성원으로서의 나무에 대해 생각해 본다. 숲을 이루고 있는 모든 생명은 그가 처한 한계를 체념하지 않고 극복한다. 빛이 적으면 적은 대로, 물이 모자라면 모자라는 대로, 바람이 많이 불면 많이 부는 대로 적응시켜 나가면서 자신을 이루어낸다. 그리고 기꺼이 숲이라는 전체 운행에 참여한다. 이렇게 운행에 참여하면서도 세상 사람들처럼 시끄럽지 않고 조용하다. 세상의 모든 시비가 끊어졌으니 고요요 적막이다. 완벽한 균형상태다.

나는 ‘균형’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그래서 이 ‘균형’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은 날에는 옛날 영화 한 편을 꺼내본다. ‘사막의 라이온’이다. 20세기 초, 제국주의가 기승을 부릴 즈음, 이탈리아가 리비아를 침공했을 때 용감하게 저항한 베드윈족의 뛰어난 지도자 요마르 무크타르(안소니 퀸 분)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이 영화 첫머리에 선생(요마르 무크타르)이 코란 경전을 가르치는 장면이 나온다. 먼저 요마르 무크타르가 코란을 보조교사에게 읽게 한다. “인정 많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자비로운 하느님께선 코란을 알리게 하셨다. 그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말을 가르쳐주셨고 태양과 달을 창조하시고 하늘을 만드신 후 사물의 균형을 잡으셨다.” 이에 선생이 묻는다. “그래 맞다. 균형이다. 그런데 왜 하느님께서 균형을 잡으려고 했지?” 또 한 학생이 대답한다. “균형이 없으면 모든 것이 파괴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수업이 진행되고 있는 바로 그때 평화롭던 시골마을에 이탈리아 군대가 쳐들어온다. 선생은 ‘균형을 잡기 위해’ 총을 잡고 전선으로 나간다. 요마르는 뛰어난 전술로 현대식 장비로 무장한 이탈리아군을 연달아 패퇴시킨다. 하지만 집요하게 요마르를 추적한 이탈리아군은 마침내 그를 생포해 공개리에 교수형에 처함으로써 전쟁을 종결짓게 된다. 균형상태는 깨어지고 평화는 파괴되었다.

새해 들어 미국의 정밀 타격으로 이란 군부의 최고권력자이자 중동정책 전반을 지휘해온 솔레이마니가 희생되면서 양측의 전면충돌 가능성이 최고조로 치달았다. 이란이 미군기지 몇 곳을 보복 공격했다. 미국의 솔레이마니 암살에 대응해 이란이 미사일 공격으로 보복에 나선 것이다. 물론 이란의 이러한 미사일 공격행위는 바람직하지 않다. 하지만 상황을 이 지경에 이르게 만든 쪽이 더 큰 책임감을 갖고 사태 수습에 나서야 하는 건 당연하다. 현실적으로 사태를 진정시킬 열쇠를 쥔 쪽도 이란보다 압도적인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는 미국임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더 이상의 유혈 보복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자제해야 한다.

노자(老子) 61장에는 우리네 상식으로는 좇아갈 수 없는 이야기 하나가 나온다. 큰 나라는 작은 나라 아래로 내려감으로써 작은 나라를 얻고, 작은 나라는 큰 나라 아래에 있어서 큰 나라를 얻는다는 이야기. 저보다 작은 나라를 등에 업고 떠받들어줌으로써 그 작은 나라를 심복(心服)시키지 못하고서는 결코 큰 나라로 존재할 수 없다는 가르침.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거든 네가 먼저 대접하라(마태복음 7:12)’는 예수님 말씀과 닮았다.

전쟁은 대개의 경우 정의의 얼굴을 가장하고 우리 앞에 나타나지만 사실은 더 많은 떡고물을 차지하려는 국가 간 다툼일 뿐이다. 처음부터 정당한 전쟁이란 찾기 힘들다. 설사 정당한 이유에서 시작되었다 하더라도 일단 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우리 인간이 겪는 고통 중에서 가장 비극적인 고통을 겪어야만 한다. 그래서 어떤 이유이든 간에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산상수훈의 일곱 번째 선언. “평화를 만드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복음 5:9).” 새해 숲속, 완벽한 균형상태에서 평화에 젖어드는 느낌이 너무 좋다.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이 세상도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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