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5년 5월28일에 충청도사 김일손이 올린 상소 26조목 중 14번째는 “인재 천거를 열 개의 과목으로 할 것입니다.”이다.

“옛날 사마광(司馬光)의 건의로 송조(宋朝)에서는 십과(十科 열 개의 과목)를 두어 선비를 천거하였는데, 요즘 우리 조정에는 천거하는 법이 거의 폐지되었습니다. 《대전(大典)》에는 동반(東班)·서반(西班)에서 해마다 수령(守令)과 만호(萬戶)될 만한 자를 천거하고, 정부에서는 육조와 대간(臺諫)이 함께 관찰사와 절도사(節度使)가 될 만한 자를 천거한다하였는데, 이는 법만 있을 뿐 실시함이 없었습니다. 또한 홍문록(弘文錄)·사유록(師儒錄)·승문록(承文祿)이 있어, 십과를 모방한 규정이 있기는 하나 실시하지는 않았습니다.

신은 원하옵건대, 해마다 의정부에서 육조와 대간과 시종(侍從)과 함께 십과로써 선비를 천거하고, 천거되어 들어온 자가 물망에 만족하지 못할 때에는 대간이 논박하여 바로잡으면 공정한 도리가 행하여질 것입니다. 선왕(先王) 성종께서 26년 동안 인재를 양성하여 무성하게 배출되어 서울과 지방에 퍼져 있습니다. 그러나 신하들이 천거하여 올리지 않으면 전하께서 어찌 어질고 어질지 못한 것(賢否)을 알아서 쓰겠습니까.”

상소의 15번째 조목은 “선비를 시험 보이는 데는 전공한 경서(專經)를 쓸 것입니다.”이다.

“일찍이 살펴보니, 중국에 과거보는 자는 사서(四書) 외에 다만 한 가지 경전(經傳)만 전공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국자감(國子監)에 오경박사(五經博士)를 두고 있습니다. 대개 한(漢)나라 이래로 양구하(梁丘賀)·하후승(夏侯勝)·이대(二戴 : 한(漢)나라 예학자(禮學者) 대덕(戴德) 및 그의 조카 대성(戴聖)을 대소대(大小戴)라 칭하는데, 대덕이 지은 예학은 대대례, 대성이 지은 예학은 소대례라 칭함.)·왕필(王弼)·정현(鄭玄)등 제자명가(諸子名家)의 학문이 다 그러합니다. 그러나 지금 국가에서는 과거시험을 보는 데 있어서 반드시 삼경(三經)을 쓰고 오로지 암송하는 데만 힘쓰는데, 심한 자는 성경(聖經)의 여러 자료를 모아 엮거나 요점을 추려 엮어 입과 귀에만 익혀 빨리 과거할 준비를 삼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선비를 구한다면 필요한 인재 얻기가 어렵습니다. 이미 과거에 합격 된 후에는 아예 전제(筌蹄)가 되어 버리는데 유사(有司)가 전공할 경전을 억지로 지정해 주어도 묘유(卯酉 : 관원의 출퇴근 시간. 묘시 곧 아침 5시부터 7시 사이에 출근하였다가, 유시 곧 저녁 5시부터 7시 사이에 퇴근함)의 여가에 다만 구두(句讀)를 떼어 읽는데도 오히려 까마득한데, 하물며 전문으로 공부하기를 바라겠습니까. 신 같은 무리들이 모두 그러합니다.”

여기에서 전제(筌蹄)의 전(筌)은 고기 잡는 통발이요. 제(蹄)는 토끼 잡는 창애인데 이미 고기와 토끼를 얻은 다음에는 창애와 통발을 잊어버리게 된다는 말이다. 《장자(莊子)》 외물편(外物篇)에, "고기를 얻은 다음에는 통발을 잊어버리고, 토끼를 얻은 다음에는 창애를 잊어버린다."라 하였다.

김일손의 상소는 계속된다.

“신은 원하옵건대, 이제부터 과거 보는 자는 오로지 한 경전(經傳)만 전공하게 하되, 전공한 경전에 통달하지 못할 경우는 기용하지 않으면 경전에 통달한 선비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사람의 자성(資性)은 각기 적소(適所)가 있으니, 이미 명경과(明經科)를 설치하였으면, 마땅히 굉사과(宏辭科)도 설치하여 과거 때마다 한 두 사람을 겸하여 뽑으면 장차 인재를 빠뜨리는 걱정은 없을 것입니다.

왕정(王政)은 인재를 근본으로 합니다. 고사(故事)에 임금이 즉위할 때 반드시 별시(別試)가 있었으니, 대개 별시는 식년(式年)에 비할 것이 아니므로, 인재를 구하기는 마땅히 널리 하되 원점(圓點 성균관 유생의 출석을 알기 위하여 식당에 들어올 때 출석부에 점을 찍게 하던 일)에 구애되지 않아야 옳을 것입니다.

전 날에 귀양 보내거나 과거 응시를 정지시킨 선비들은 다 선왕께서 수십년 간 교육시켜 전하에게 물려준 사람들입니다. 비록 그들의 날카로운 기백은 꺾을지라도 마땅히 광간(狂簡)한 재주는 다듬어서 써야 합니다. 인재는 제한되어 있고, 하루 이틀에 길러내는 것이 아니므로 신은 매우 아쉽게 여깁니다. 신은 원컨대, 전하께서 속히 그들의 죄를 용서하여 성균관에 나아가서 학문을 연마하게 하고 밝으신 교지를 기다리게 하면, 사림(士林)의 다행인 것입니다.”

연산군은 성종이 돌아가시자 불교의 제례인 수륙재를 올렸다. 이에 성균관 유생들이 반대하였다. 연산군이 이들을 죄주려 하자, 대간과 홍문관이 유생을 죄주는 것이 타당치 못함을 논계하였으나 연산군은 듣지 않았다. 연산군은 1495년 1월27일에 정희량을 해주로, 이목을 공주로, 이자화를 금산으로 귀양 보내고, 생원 조유형 · 임희재 등 21인의 과거시험 응시를 정지시켰다.

김일손은 연산군의 이런 처사에 대해 간언했다.

청계서원 (경남 함양군 소재, 1498년 7월 초에 김일손이 붙잡혀 간 곳) (사진=김세곤)
청계서원 (경남 함양군 소재, 1498년 7월 초에 김일손이 붙잡혀 간 곳) (사진=김세곤)
청계서원 편액 (사진=김세곤)
청계서원 편액 (사진=김세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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