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간원 헌납이 되자 김일손은 더욱 소신을 피력하였다. 1495년 10월9일에 김일손은 신녕현감(新寧縣監) 길수(吉壽)의 실정과 왜인들의 행패에 대해 조치하도록 아뢰었다.

“신이 듣자오니, 신녕현감 길수가 아전들 다루기를 엄하고 사납게 하니, 향리(鄕吏) 등이 꺼려서 자주 읍 사람들을 시켜서 사실 없는 것을 고소하고 호장(戶長) 10여 명이 현감을 낭패하게 하려고 반란을 일으켜 산으로 올라갔는데 현감이 사람을 시켜 따라가서 잡으려 하였으나 아전들이 잡기를 거부하니, 장교 한 사람을 보내어 고을에 있는 아전증 따르지 않는 자들을 불러내어 잡아가고 들판에 주둔하여 일이 더 커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급히 추포(追捕)하여야 하겠으며, 먼저 그 처자들을 먼 국경 지방에 옮기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신녕현감과 아전들의 갈등이 드러난다. 신녕현(新寧縣)은 지금의 경북 영천군 신녕면이다.

간언은 이어진다.

“신은 또 들으니, 왜인(倭人)이 충주(忠州) 단월역(丹月驛)에 도착하여 역리(驛吏)를 책망하여 닭을 잡아 대접하라고 하였는데, 역리가 국상(國喪)중이므로 좇지 않으니, 왜인이 이르기를 ‘너희 나라에는 상사(喪事 성종의 국상)가 있지만 우리 도주(島主 대마도주)는 건강하다.’고 하면서 강제로 취하여 먹었으며, 충주읍에 당도하여서는 잔치상을 차려 대접하라고 독촉하는 것을 충주의 관원이 끝내 베풀어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충주에서의 왜인의 횡포는 김일손이 충청도사 때 올린 1495년 5월28일 상소에서도 언급되어 있다.

“사람은 다 북쪽을 근심하나 우리 혼자 남쪽을 근심합니다. 신은 왜노(倭奴)의 실정을 보니,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더욱 교만하여 이미 어살[魚箭]을 쟁탈하고 또 웅천(熊川)을 위협하며, 요사이 충주까지 지나와서 연향(宴享)을 마련하라고 재촉하며, 너희 나라는 국상이 났지만 우리 임금은 병이 없다 하니, 신이 들으매 통분함을 견디지 못합니다.”

5월 하순의 상소 이후 5개월이 지난 10월에 헌납으로 자리를 바꾼 김일손이 또 다시 왜인의 횡포를 간언하는 것을 보면, 그동안 조정에선 별도의 조치가 없었던 듯 하다.

왜인들에 대한 김일손의 간언은 이어진다.

”그뿐 아니라 통사(通事)들이 왜인을 빙자하고 수없이 내라고 하매, 고을 관원들이 미치지 못할까 염려하여 응대하니 더욱 교만한 마음을 내어 관가를 업신여긴다 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특송왜(特送倭 왜인 사신 중 특수 사명을 띠고 오는 사신을 말한다. 처음 세종 25년(1443)의 계해약조때 물품 교역을 위하여 오는 이른바 세견선(歲遣船) 50척 외에 특별보고 사항이 있으면 특송선(特送船)을 보내게 하였는데, 거기에는 정관(正官)이 문서를 가지고 왔으며, 조선은 접위관(接慰官)을 보내어 서울까지 안내하였다.)는 조정에서 후대하는 것이니 자연 호송관이 있을 것이지만, 만일 여느 왜의 고장 사람으로서 통사가 압령(押領)하여 온 자라면 한결같이 《대전속록(大典續錄)》의 규정한 바에 의거하여 관청에 머물러 있지 못하게 하며, 통사로서 함께 통하여 작폐(作弊)하는 자는 법을 밝혀 죄를 다스리고, 통사 및 선군(船軍) 등이 보통 때에 병기·각궁(角弓) 등 물건을 왜인과 더불어 사사로이 서로 매매하여 이익을 취하는 것은 금지하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또 들으니, 통사 3명이 몰래 왜인을 데리고서 변복하고 절도사영(節度使營)에 들어가서 장사를 하며, 제포(薺浦) 수군은 번을 교대할 때에 가졌던 병기를 왜인의 집에 맡겨두니, 최진강(崔進江)이 웅천현감(熊川縣監)이었을 때에 제포의 왜인들이 성 밑에서 소나무를 찍는 것을 진강이 사람을 보내어 잡아오게 하였는데, 왜인들이 검을 빼어 들고 떠들며 보냈던 사람과 군관을 구타하니, 진강이 겨우 몸을 피하였다고 합니다.

전에는 왜인들이 법령을 범하면 첨사(僉使)·현감 등이 항상 자의로 형장(刑杖)을 사용했기 때문에 감히 법령을 범하지 못하였는데, 근래에는 교만 방종이 이러하니 이것은 변방 장수에 사람이 없어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후로는 왜인이 있는 곳의 변방 장수는 모름지기 위엄과 덕망이 있고 청렴 근실한 자를 선택해서 보내야 하겠습니다."

웅천현(熊川縣)은 지금의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지역이다.

이 지역에 상주하는 왜인이 증가하여 그 피해를 입기쉽고 해안의 요충지임을 감안하여 1452년(문종 2)에 웅천현으로 승격하였다. 웅천현에는 종6품의 현감이 파견되었는데 수군 진(鎭)이 있었던 관계로 무관이 배치되었다.

이에 연산군은 전교하였다.

"신녕현 향리의 일은 감사에게 하서(下書)하라. 웅천의 왜인 사건은 최진강을 불러 묻게 하되, 원상(院相) 및 의정부·육조(六曹) 판서가 의논하게 하라. 또 김일손이 아뢴 일 중, 행할 만한 것은 다시 밝혀 아뢰게 하라."

이러자 10월10일에 원상(院相) 및 의정부·육조(六曹) 판서가 의논하였다.

창덕궁  희정당 정문 (사진=김세곤)
창덕궁 희정당 정문 (사진=김세곤)
창덕궁  희정당 정문(사진=김세곤)
희정당 건너편의 빈청, 지금은 카페로 운영 (사진=김세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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