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16일에 유자광과 강귀손의 설전은 계속되었다.

강귀손이 아뢰었다.

“처음 편찬자의 국문을 청하자고 발의할 때에, 신은 말하기를 ‘그 글 뜻이 진실로 해득하기 어려우니, 편집한 자가 만약 그 뜻을 알았다면 진실로 죄가 있지만, 알지 못했다면 어찌하랴.’ 하였는데, 유자광의 말이 ‘어찌 우물쭈물하느냐?’,‘어찌 머뭇머뭇하느냐? 고 하니, 신이 실로 미안하옵니다.

김종직의 문집은 신의 집에도 역시 있사온데, 신은 일찍이 보고도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신이 듣자니, 조위(曺偉)가 편집하고 정석견(鄭錫堅)이 간행했다 하옵는데, 이 두 사람은 다 신과 서로 교분이 있는 처지입니다. 지금 신의 말은 이러하고 유자광의 말은 저러하니, 유자광은 반드시 신이 조위 등을 비호하고자 하여 그런다고 의심할 것이온즉, 국문에 참예하기가 미안합니다. 청컨대 피하겠습니다.”

강귀손도 집에 있는 문집에서 조의제문을 보았으나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윤필상 등도 마찬가지였다. 오로지 유자광만이 조의제문이 세조를 비난한 글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한편 김종직의 문집의 편집자는 매계(梅溪) 조위(曺偉 1454∼1503)이다. 조위의 아버지는 울진현령 조계문이고, 큰 누나는 김종직의 부인이었다. 조위는 1474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도승지, 호조참판과 충청·전라도관찰사 그리고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그런데 조위는 1498년 4월11일에 성절사(聖節使)로 중국 명나라로 갔다. 따라서 무오사화가 일어난 7월에는 국문을 받지 않았고, 9월6일에 귀국하여 공초를 받고 의주로 유배되었다. 

(사진=김세곤)
매계구거 (김천 출신 조위가 태어난 곳) (사진=김세곤)
(사진=김세곤)
율수재 (사진=김세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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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 율수재 안내판 (사진=김세곤)

문집을 간행한 정석견(1444∼1500)은 1474년(성종 5)에 급제하여 사간원정언을 지냈고, 1485년에 이조좌랑에 올랐다. 1493년 동부승지에 임명되었고, 1495년(연산군 1)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 병조참의를 역임했고, 1497년에 대사간을 거쳐 이조참판에 올랐다.

한편 연산군은 “편집한 자나 간행한 자를 아울러 국문하도록 하라.”고 전교하고 강귀손에게는 “유자광의 말이 비록 그러하다 할지라도 경이 피(避)해서는 되겠는가?”라고 전교하였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6일 1번째 기사)

이 날 대사헌 강귀손은 사촌인 이곤의 일로 대간들의 탄핵을 받자 사직을 청했다.

대사헌 강귀손이 아뢰었다.

"이전에 사헌부의 의논이 ‘병조낭청(兵曹郞廳)이 다 집을 지었으니, 당연히 국문해야 한다.’하기에, 신이 저지하기를 ‘좌랑(佐郞) 이곤(李坤)은 나의 사촌이요, 또 이곤이 새로 지은 집은 나의 첩자(妾子)가 새로 지은 집과 서로 잇대었는데, 이곤이 내 첩자의 집에서 돌을 가져가기에 내가 말렸으나 이곤은 듣지 않았다. 그러나 감히 겨루지 않았으니 겨루면 그 과실이 이곤과 서로 같이 때문이었다.

그 후 이곤은 매양 다른 사람을 보면 나의 과실을 말했다는데, 지금 만약 그가 집 지었다고 그를 국문한다면, 이곤이 반드시 원망하여 내가 부탁하여 한 일이라 할 것이니, 묻지 말아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그런데 근일에 사헌부에서 다시 이전의 논의를 발의하여 이곤의 집을 조사한다고 하니, 신이 처음에는 이 의논을 저지하였지만 지금에도 이렇게 한다면, 여론이 신과 이곤 사이에 ‘묵은 혐의가 있어서 그렇다.’ 할 것입니다. 신이 용렬한 몸으로서 지금 이 직에 있기가 미안하오니, 청컨대 피혐하겠습니다.”

이러자 연산군은 전교하기를, "피혐(避嫌)할 까닭이 없다."고 하였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6일 2번째 기사)

이렇게 연산군(1476∼1506)은 강귀손에게 너그럽다. 그것은 강귀손과의 특별한 관계 때문이었다. 연산군은 돌도 채 되기 전에 심한 중병을 앓았다. 이러자 왕실에서는 법도 있는 집에 옮겨 병을 낫게 한다는 관례에 따라 강희맹(강귀손의 부친)의 집에 연산군을 보냈다. 강귀손의 모친인 안씨 부인은 지극 정성으로 연산군을 잘 돌보아 쾌유시켰으며, 이후 여러 차례 개구쟁이인 연산군의 위기를 슬기와 지혜로써 구해 주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사례는 연산군이 실 꾸러미를 삼킨 일이다. 연산군은 유년 시절에 몹시 장난이 심하였던 모양이다. 하루는 실 꾸러미를 목에 삼켜서 질식 직전에 이르렀는데 유모는 아무도 조처를 하지 못하고 당황하고 있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안씨 부인은 유모를 시켜 양 귀밑을 잡게 하고 손가락을 넣어 실 꾸러미를 꺼내 연산군을 살려냈다. 그리고 이 일은 불문에 붙이라고 당부하기를 잊지 않았다. 이런 인연으로 연산군은 왕위에 오른 이후 강희맹 집안에 대하여 남다른 관심과 애정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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