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행복을 놓치며
대개는
과거의 기억과 추억에 잡혀 산다
과거의 자신을 각색하고
기억을 바꾸어 가면서…

정숙자 문학박사
정숙자 문학박사

[한국농어촌방송/경남=정숙자 문학박사] 태풍이 강풍과 함께 물 폭탄을 데리고 온다는 뉴스가 나오자 우리 집 앞, 진양호의 물들이 앞다투어 빠르게 빠져나가기 시작하더니 호수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호수에 잠겨있던 과거의 올망졸망한 집터들이 드러나고, 누군가가 수도 없이 오고 가며 걸었던 좁은 골목길도 보인다. 동네 어귀에 큰 나무가 있던 자리는 나무는 사라지고 늙은 뿌리는 민낯을 드러내고 있다. 누군가의 과거가 태풍이라는 자연의 시련에 살아서 내게 말을 건네고 있다. 추억이라는 이름을 빌어서 오랫동안 묵은 이야기를 펼치고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과거에 대한 회귀본능이 있어 보인다. 나보다 앞선 사람들은 지금 내가 사는 이 나이가 행복하고 좋은 시기라고 말한다.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고 느끼지 못하고 나보다 젊은 시절의 사람들을 보며 그때가 제일 행복한 시기라고 한다. 현재의 행복을 놓치면서까지 대개는 과거의 기억과 추억에 잡혀 산다. 과거에는 누구나 선남선녀였으며 천재였고 희망적인 아이였다. 내가 아는 현재의 사람들은 과거와 별반 다를 것이 없이 어제를 살고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가 말하는 천재나 영웅도 아니었고, 조각미남이거나 예쁘지도 않았고 스포츠에 뛰어난 사람도 아닌 평범한 아이였다. 무슨 용기로 과거의 자신들에게 각색을 하고 마치 존재했던 일처럼 본인들의 기억을 바꾸어 놓았는지 모를 일이다. 현재까지 살아오는 과정에 분명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외계인의 방문이 있어 본인들의 과거를 최상의 상태로 남겨 두었나 보다.

오늘은 태풍의 지친 바람에 해는 가려지고 나뭇잎들은 힘없이 떨어져 뒹굴고 있다. 철새 한 마리는 큰 소나무 가지를 차지하고 바람 속에 앉아 있다. 유리창 가장자리에 좋은 곳을 골라 향기 진한 차를 준비한다. 차 향기가 유리창을 넘어 새의 보금자리를 지나 텅 빈 호수의 바닥에 숨겨진 추억으로 가는 길에까지 닿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말이다. 적어도 오늘 우리는 살아있고 이 태풍을 잘 견디고 버티고 있음을 알리고 싶은 모양이다. 내가 주인공이 되어 오늘이 빨리 지나가는 것을 막아서고 싶다. 오늘이 내게서 조금 더디게 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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