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8년 7월17일에 연산군은 신하들을 모아 놓고 김종직의 조의제문에 대하여 논의하여 부관참시를 결정했다. 이어서 윤필상 등은 김종직이 ‘도연명의 술주시를 화답한 시’에 대하여 아뢰었다.

“김종직이 도연명(陶淵明)의 술주시(述酒詩)를 화답하였는데, 서문에 말한 것은 조의제문보다도 심한 점이 있어서 차마 말을 못하겠습니다.

그 서문에 이르기를, ‘내가 젊어서 술주(述酒) 시를 읽고 그 뜻을 알지 못했는데, 도연명의 시에 화답한 탕동간(湯東磵 동간은 송나라 탕한(湯漢)의 호)의 주소(註疏 본문에 대한 주해)를 보고서야 소상히 영릉(零陵: 진 공제 晉 恭帝)을 애도하는 시임을 알게 되었다.

아아, 탕공(湯公)이 아니었다면 유유(劉裕)의 찬시(纂弑)의 죄와 도연명의 충분(忠憤)의 뜻이 거의 숨어버릴 뻔하였도다.

도연명이 은어(隱語)를 쓰기 좋아한 것은, 그때는 유유가 한창 날뛰는지라 그의 힘이 용납될 수가 없는 형편이니, 그는 다만 몸이나 깨끗하게 할 뿐이요, 언어 가운데 그런 일을 드러내서 일가족이 멸족(滅族)당하는 화를 자초해서는 안 된다고 여겼던 것이나, 지금의 나는 그렇지 않다. 천년 뒤에 태어났으니, 어찌 유유가 두려울 것이냐?

그러므로 유유의 흉역(凶逆)을 모조리 폭로하여 탕공의 주소(注疏) 끝에 붙이노니, 후세의 난신적자(亂臣賊子)가 나의 시를 보고 두려워한다면 《춘추(春秋)》의 일필에 비교할 수 있으리라’ 하였는데, 그 시(詩)는 없어졌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7일 4번째 기사)

김종직은 「도연명의 술주시에 화답하다〔和陶淵明述酒〕」라는 시를 지었다. 「술주(述酒 술을 이야기하다)」시를 지은 도연명(365∼427)은 「귀거래사」로 유명한 은일(隱逸) · 전원(田園)시인이다. 그는 강서성 구강현의 시상(柴桑)에서 태어났는데 생활이 그다지 풍족하지 못한 소지주 가정에서 자랐다.

그는 29세 때에 벼슬길에 올라 주(州)의 제주(祭酒)가 되었지만, 얼마 안 가서 사임하였다. 그 후 군벌 항쟁의 세파에 밀리면서 생활을 위하여 하는 수 없이 관직생활을 하였다. 그런데 그는 41세 때인 406년에 누이의 죽음을 구실삼아 팽택현령을 사임한 후 전원에서 살았다.

이때의 퇴관 성명서가 『귀거래사(歸去來辭)』이다.

돌아가리라, 전원이 황폐해지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으리오.

스스로 마음을 육신의 노예로 삼아 놓고, 어찌 근심하고 홀로 슬퍼만 하겠소.

지나간 일 돌이킬 수 없음을 깨닫고, 앞으로 올 일은 바르게 쫓을 수 있음을 알았다오.

실로 길을 잃었으나 아직 멀리 가지는 않았으니, 지금이 옳고 어제가틀렸음을 깨달았소.

그는 향리의 전원에 퇴거하여 스스로 괭이를 들고 농경 생활을 하였다. 그는 「귀원전거(전원의 집으로 돌아와)」시는 관직을 떠난 홀가분함. 자연에 돌아온 기쁨. 순박한 이웃과의 내왕 그리고 농사의 직접 체험등을 노래하였다. 「음주(飮酒 술을 마시며)」 20수와 「지주(止酒 술을 끊으며)」 시를 지은 도연명은 애주가였다.

도연명은 중국 동진(東晋 317~420) 말기부터 남조(南朝)의 송(宋 420~479)나라 초기에 걸쳐 살았는데, 당시는 난세였다. 동진(東晉)은 사마예(司馬睿)가 양자강 이남에 세운 왕조인데, 동진 시대에는 군벌과 호족세력이 득세했다. 그리하여 환현(桓玄)을 토벌하여 중앙의 정권에 접근한 유유(劉裕 363~422, 재위 420∼422)는 420년 7월에 동진의 공제(恭帝)를 시해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송나라를 세웠다.

도연명의 나이 56세 때의 일이었다. 그는 유유가 공제를 시해한 일에 대하여 분개하는 마음을 은밀하게 나타내는 술주(述酒)시를 지었다.

도연명은 이름이 잠(潛)인 도연명은 문 앞에 버드나무 5그루를 심어 놓고 스스로 오류(五柳)선생이라 칭하기도 하였다. 63세로 세상 떠날 때까지 23년간 고향에서 전원생활을 하였다.

예림서원 (김종직을 모신 서원, 경남 밀양시) (사진=김세곤)
예림서원 (김종직을 모신 서원, 경남 밀양시) (사진=김세곤)
예림서원 강당 내부 (사진=김세곤)
예림서원 강당 내부 (사진=김세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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