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사변은 외국인에게도 초미의 관심이었다.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20일)의 상황은 민왕후의 주치의 언더우드 부인과 영문 월간지 <한국 소식> 운영 및 편집인 헐버트 그리고 주미공사 대리 알렌과 영국 여행작가 비숍 여사의 저술에도 기록되어 있다.

먼저 1888년에 의료선교사로 조선에 온 언더우드 부인은 <조선 견문록>에서 이렇게 적었다.

“10월 8일 아침에 대궐에서 나는 총소리를 들었다. 오후가 되어서야 한 조선 양반을 만나 왕비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 그런데 전해진 소식들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것들이 꽤 있었는데 현장에 있던 러시아인 사바틴과 미국인 다이 장군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딱 맞아 떨어졌다. (중략) 일본 자객들은 왕비를 칼로 찔러 죽였다. 그런 뒤에 왕비의 시체를 덮어두었다가 궁녀를 데려와서 보여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공포에 질러 “중전마마 중전마마 ”하고 소리쳤다.

그 뒤에 곧 거기서 그다지 머지않은 작은 숲으로 시체들을 옮겼고 그 위에 등유를 부었다. 그리고 불을 붙였고 뼈 몇 줌만이 남았다.

갖가지 얘기들이 떠돌았다. 중전은 무사히 피신을 하여 어디에 숨어계신다는 등, 일본인들이 잠깐 데려갔을 뿐이니 언제라도 다시 모셔올 수 있다는 등의 얘기였다.(김철 옮김, 언더우드 부인의 조선견문록, p 185-189)

헐버트는 <대한제국 멸망사> ‘제9장 민비 시해사건’에서 이렇게 적었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3시에 여러 명의 일본인이 한강 가까이에 있는 대원군의 처소로 가서 그를 데리고 서울로 전진했다. 떠나기 직전에 그들의 인솔자는 필요한 경우에는 ‘여우’를 처치하라고 말했는데 이는 말할 것도 없이 민비를 죽이라는 의미이다.

(중략)

민비는 한 침실에서 발견되어 무참히도 난도질당했다. 칼질을 한 사람이 누구냐 하는 문제에 대하여는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무장한 일본군이었으리라는 것이 지배적인 추측이다. 시체는 몇 가지의 천으로 싼 다음 석유를 뿌리고 소나무 숲의 한 모퉁이에서 불에 태웠다. (중략)

날이 밝기 전에 왕은 일본공사에게 급히 글을 보내어 이번 일이 어찌 된 영문인가를 물었다. 통보인이 도착했을 때 미우라와 스기무라 후카시는 이미 잠에서 깨어 옷을 입고 있었으며 문밖에는 교자가 준비되어 있었다. 공사와 그의 비서는 곧 대궐로 향했다. 그들이 도착하자마자 모든 소란은 갑자기 진정되고 낭인들은 궁궐을 떠났다.

공사는 알현을 청했다. 국태공(대원군)도 물론 이 자리에 있었다. 이 자리에는 세 개의 문서가 마련되어 왕의 서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첫째는 앞으로는 내각이 국내의 제반 문제를 처리하도록 보증하는 것이며 둘째는 방금 시해된 이경직의 후임으로 왕의 형인 이재면을 궁내부 대신으로 임명하는 것이며 셋째는 내부협판을 임명하는 것이었다. 왕은 어쩔 수 없이 이 문서에 서명했다.

곧 일본군은 모두 궁궐로부터 물러났으며 오직 일본군이 훈련시킨 조선군만이 궁의 수비병으로 남았다.

날이 밝기 전인 아침 일찍 러시아 대리공사 베베르와 미국 임시 대리공사 알렌이 궁궐로 달려와 알현을 청했으나 왕은 만날 수 없다는 통지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굽히지 않고 고집하여 왕을 알현하는 데 성공했다. 그 자리에서 고종은 그들에게 자신은 아직도 민비가 안전하게 몸을 피했으면 하는 기대를 걸고 있노라고 말하고, 이 문제가 더 악화되지 않도록 그들이 우의깊게 전력해줄 것을 간청했다. 다른 외교 사절들은 그 날 늦게야 접견했다. (헐버트 지음·신복룡 역주, 대한제국 멸망사, 집문당, 2019, p176-180)

한편 당시에 주미공사 대리를 한 알렌은 1908년에 저술한 <조선견문기> ‘5장 영사와 공사 시절에 있었던 일’에서 이렇게 적었다.

“ 철도부설을 촉진한 암살

얼마 뒤에는 민비의 가공할 비운이 전화위복이 되어 실제로철도부설을 미국에 양도하는 결과가 되었는데 그 내막은 다음과 같다.

내가 대리공사로 근무하고 있을 때인 1895년 10월 어느날 새벽, 궁중에서 위급한 일이 발생하고 있으니 서둘러 입궐하라는 임금님의 하명을 받고 나는 병원에서 나와서 궁중으로 갔다. 나는 도중에 러시아 공사를 방문하여 함께 궁중으로 갔다. 우리가 도착한 바로 그때 피 묻은 옷을 입은 악한들이 왕비를 살해한 뒤에 현장을 떠나는 것을 목격했다.

이 사건이 일어나자 일본 정부는 깊은 유감을 표시했다.” (알렌 지음 · 신복룡 옮김, 조선 견문기, 집문당, 2019, p 213 )

장안당 (경복궁 건천궁의 왕의 침실) (사진=김세곤)
장안당 (경복궁 건천궁 안 왕의 침실) (사진=김세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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