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데타로 집권한 세조는 우리 역사의 큰 재앙쿠데타를 성공만 하면 영웅이 된다는 선례를 남겨정난공신들에 의지한 세조의 정치 붕당정치를 낳아분경금지법 철회하지 않았더라면 조선 역사 달라졌을 것불행한 역사 되풀이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집필[한국농어촌방송/경남=정원찬 작가]1. 소설을 탈고하기까지역사바로세우기, 과거사 규명, 적폐청산, 이런 정치 논리가 내 의식의 저편에서 머무는 동안 나는 조선왕조실록을 읽는 재미에 빠져 있었다. 거기에는 5백 년 동안 한 번도 숨을 멈추지 않고 살아 움직이는 역사가 담겨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조
순천 노비의 신분에서 한양으로 올라온 경혜공주 딸을 낳아두 아이의 신원회복을 세조에게 끊임없이 요구해공주의 신원은 예종 때 회복되고 자녀 신원은 성종 때 회복아들의 지극한 간병에도 불구 39세의 나이로 한 많은 삶을 마감남편 영양위는 사후 297년만인 영조 때 신원회복경혜공주가 작성한 재산 상속 문서 분재기 2012년에 발견[한국농어촌방송/경남=정원찬 작가]1. 순천에서 다시 한양으로남편 정종이 능지처참되고 순천 관노가 된 경혜공주.공주를 순천의 관노로 팽개쳐 둔다는 것은 세조로선 상당한 정치적 부담이었다. 영양위 정종을 죽임으로써
동병상련인 자을산군과 정미수 서로 의지하며 죽마고우로 자라경혜공주 세조에게 자식의 면천과 신원회복을 끊임없이 요구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못한 세조, 예종에게 떠안긴 채 숨져죽마고우 성종의 즉위로 정미수 마침내 신원회복중종반정 때 공신 반열에 올라 부귀영화를 누려경혜공주의 득병으로 똥오줌을 맛보면서까지 간병한 효자[한국농어촌방송/경남=정원찬 작가]1. 동병상련의 꿈어린 두 아들을 안고 사저로 물러난 수빈(인수대비)은 날개를 잃은 한 마리 가련한 새에 지나지 않았다. 한때 꿈꾸던 중전의 자리도, 남편의 뒤를 이어 아들이 용상에 오르는 꿈
두 딸을 명나라에 공녀로 보낸 집안의 딸로 태어나수양대군 정략적 계산으로 한씨를 큰며느리로 들여남편 의경세자의 요절로 세자빈 자리마저 잃어차남 자을산군의 배필로 한명회의 셋째 딸과 혼사 성사시켜예종의 요절로 왕위에 올라 성종이 된 자을산군성종 비 윤씨의 폐비 및 사사로 연산군과 갈등 겪어[한국농어촌방송/경남=정원찬 작가] 인수대비로 불리는 소혜왕후 한씨(1437~1504년)는 한확의 9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14살이 되던 해에 수양대군의 장남 도원군(의경세자)에게 출가하여 군부인이 되었고 세조가 즉위하자 남편 도원군이 세자가 되
계유정난으로 권력을 잡은 세조 유래없는 많은 살육을 자행능지처참으로 죽인 충신만 50명이 넘어친동생 안평대군과 금성대군마저 역모로 몰아 죽여세조의 인과응보 두 아들 모두 20세에 요절악몽에 시달려 잠을 이루지 못하길 일쑤피부병이 심해 고름 냄새가 천지에 진동 50세로 생 마감[한국농어촌방송/경남=정원찬 작가]1. 잔인한 살육세조는 권력 유지를 위해 많은 살육을 잔인하게 자행했다. 신채호의 에 의하면 계유정난과 관련하여 107명을 처형했으며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과 관련하여 70여 명이 처형되었다. 또한 금성대군의 단종복
정종(鄭悰) 미모로 소문난 경혜공주의 배필로 간택돼신혼살림을 차린 지 2년 만에 계유정난을 맞아유배를 떠나자 경혜공주 칭병으로 세조에게 저항단종복위사건 후 수원에서 광주로 더 멀리 귀양 보내귀양지에서 아들 정미수를 출산하는 기쁨을 얻어역모죄로 엮어 능지처참 시신을 조각 내 전국에 뿌려- 장안에서 예쁘기로 소문난 경혜공주를 아내로 맞아 양덕방(지금의 계동, 가회동 지역)에 신혼살림을 차린 지 2년 남짓, 영양위 정종(鄭悰)의 행복은 거기까지였다. 어린 나이로 보위에 오른 처남 단종, 검은 속내를 드러낸 수양대군이 단종마저 죽이더니 기
수양대군이 친구인 송현수의 딸을 단종 비로 간택보위에 오른 세조 송현수를 토사구팽 해왕비가 된 지 1년 6개월 만에 왕대비로 물러나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자 군부인으로 신분 격하멸문지화를 당한 정순왕후, 경혜공주 아들에게 의지[한국농어촌방송/경남=정원찬 작가]1. 정순왕후의 운명정순왕후 송씨는 송현수의 딸로써 15살의 나이에 한 살 아래인 단종과 혼인하여 왕비에 책봉되었다. 송현수는 수양대군과 막역한 사이로써 일찍이 그의 여동생이 수양대군의 막내동생인 영응대군에게 출가하여 왕실과 인연을 맺은 적이 있었다. 훗날 수양대군이 권력을 잡
정인지 신숙주가 앞장서 단종 사사 주장금성대군과 단종의 장인인 송현수가 함께 사사된 듯세조실록 단종의 죽음을 자살로 위장, 사망일도 틀려예로써 장례 치렀다는 실록과는 달리 시신 유기영월 호장 엄홍도가 단종 시신을 몰래 수습사후 241년이 지난 숙종 때 단종으로 복위[한국농어촌방송/경남=정원찬 작가]1. 단종을 사사하다세조 3년 6월 말, 금성대군이 모반을 기획하고 있다는 고변이 들어온 이후 사건이 마무리되기까지 4개월여 동안 순흥 지방은 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그 무렵, 정인지와 신숙주가 합세하여 세조에게 주청을 올렸다. 단종이
충직한 금성대군 계유정난으로 수양대군에게 등 돌리며 갈등역모 죄로 몰린 금성대군 삭녕으로 유배 떠나수양대군 단종 주위 인물 모조리 제거하고 왕위 찬탈금성대군 유배지 순흥에서 단종복위운동을 계획해세조 군사를 보내 순흥 지역을 피바다로 만들어32세 금성대군 형으로부터 사약을 받고 사사[한국농어촌방송/경남=정원찬 작가]- 금성대군은 세종의 여덟 아들 중에서 성품이 강직하고 충성심이 많아 아버지 세종과 맏형인 문종의 뜻을 받들어 자신의 조카 되는 어린 단종을 끝까지 보호하려 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었다. -1. 금성대군을 역모로 몰
보위에 오른 세조 18세 장남 도원군을 세자에 책봉세자 병세 위급하자 대신과 종친 명산대찰에 기도케 해폐위시킨 현덕왕후가 꿈에 나타나는 악몽에 늘 시달려세자 두 아들을 남기고 20세에 요절8세인 해양대군을 서둘러 세자에 책봉예종이 된 해양대군 재위 1년 만에 20세로 급사[한국농어촌방송/경남=정원찬 작가]세조는 정희왕후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을 두었다. 장남으로 태어난 도원군(의경세자) 이숭은 13살이 되던 해 청주 한씨(훗날 인수대비)와 혼인하여 월산대군과 자을산군(훗날 성조)을 낳았다. 그러나 20살이 되던 해 요절하게 되니 차남
세종의 총애로 집현전 최고의 엘리트로 성장한 정인지김종서와 관계가 좋지 못해 수양대군 쪽으로 붙어훗날 김종서 큰며느리와 두 딸을 노비로 데려가 분풀이세종 문종 왕릉 최악의 흉지에 조성토록 개입해단종을 사사하는 데 가장 앞장서는 비정의 인물연산군 때 부관참시당하는 참극을 피해 가지 못해[한국농어촌방송/경남=정원찬 작가]1. 정인지의 양면적 평가정인지는 집현전 시절부터 세종으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아 훈민정음 창제와 연구에 많은 공을 세웠다. 그의 학문적 능력은 동시대의 인물 중에서 견줄 사람이 없을 만큼 탁월했다. 뿐만 아니라 풍수, 역
현덕왕후 단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다음날 숨져단종복위운동 직후 죄인(단종)의 어미라 하여 폐서인왕후의 친정 집안 멸문지화 피해 가지 못해세조, 형수의 무덤을 파고 관을 바닷가에 버려버려진 관 스님이 수습하여 임시로 매장죄를 소급 적용함은 부당하다고 상소 끊이질 않아[한국농어촌방송/경남=정원찬 작가] 문종 비 현덕왕후는 단종을 낳은 다음 날 숨을 거두었다. 그때는 세자빈의 신분이었는데 문종이 왕위에 오르자 현덕왕후로 추존되었다. 그러다가 사육신을 중심으로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관련자들은 모두 극형을 받게 되는데 이때
세조 정종 유배 보내고 경혜공주 부부의 재산과 직첩 몰수단종복위운동 직후 수원에서 광주로 더 멀리 유배 보내버려광주 유배생활 중 그토록 기다리던 아들 정미수 태어나세조, 영양위 정조를 성탄 스님과 연루시켜 역모로 엮어능지처참 후 시신을 토막 내 소금에 절여 팔도로 내려보내순천 관노로 쫓겨 난 공주 “나는 왕의 딸이다” 외치며 저항[한국농어촌방송/경남=정원찬 작가]1. 유배길남편 영양위 정종이 수원으로 유배를 다시 떠나는 날, 경혜공주는 기어이 남편을 따라 유배지로 따라나섰다. 그것이 경혜공주가 선택한 세조에 대한 유일한 저항 방법이
정통성 없던 세조, 왕권 지키기 위해 친단종 세력 제거단종복위사건 때 죽은 자만 500~800명…많은 목숨 잃어사육신, 생육신 남효온의 판단에 따라 충신으로 이름 남아그러나 육신 외 육종영·삼상신·사의척·삼중신 등 충신 많아이에 정조는 육신 외 단종 위해 충성 바친 신하들도 제사1978년 서울시 충절 위로하고 기리고자 사육신 공원 조성1. 사육신이란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하게 되자 충직한 많은 신하들이 세조에게 저항하였다. 정통성이 없는 세조는 이들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왕권을 지키기 어렵다는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세종 다섯 살 신동 김시습 대궐로 불러 시 짓게 해그의 재주에 놀란 세종 비단 50필을 상으로 내려세종으로부터 장래를 약속받은 김시습 학문에 매진세종 손자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 뺏기자 세상 등져울분으로 떠돌다 금오산서 최초소설 ‘금오신화’ 집필세조에 저항하며 살던 삶 59세에 무량사서 숨 거둬1. 신동의 탄생김시습은 나면서부터 천품이 남달라 생후 8개월 만에 스스로 글을 알았다고 한다. 말이 더디어 글을 볼 때 입으로는 읽지 못했으나 그 뜻은 모두 알았다. 아래는 세 살 때에 그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시이다.복사꽃은 붉고 버들은 푸르
문과 급제 후 집현전 발탁돼 세종 총애…사돈까지 맺어세종 아들인 안평대군과 죽마고우 관계, 영풍군은 사위세조 왕위 찬탈하며 안평·영풍군 등 제거에 박팽년 울분재능있는 박팽년 세조 회유에도 거절, 결국 고문으로 옥사사육신 대부분 멸문지화 됐으나 박팽년 여종의 슬기로 피해박팽년 숙종 17년에 신원 회복, 죽은 지 235년 만에 충신 추앙[한국농어촌방송/경남=정원찬 작가]1. 왕실과의 인연박팽년은 1417년 회덕현(지금의 대전)에서 태어났다. 18살에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학사가 되어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의 기록으로 보
성삼문 충청도 홍주서 무관 출신 성승의 장남으로 태어나하늘에서 ‘이제 낳았느냐?’ 세번 물어 성삼문…점괘도 충신세종 때 집현전 학사로 발탁돼 학문연구 전념하며 총애받아단종 즉위 후 수양대군(세조)이 왕위 뺏자 단종복위운동 계획복위운동 밀고로 실패…세조 국문에 “하늘에 두 해 없다”세조 분노해 능지처참·멸문지화 목숨으로 의리지킨 성삼문 [한국농어촌방송/경남=정원찬 작가]1. 출생성삼문은 외가인 충청도 홍주(지금의 홍성군)에서 무관 출신인 성승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때 하늘에서 ‘이제 낳았느냐?’라고 세 번이나 묻는 소리가
[한국농어촌방송/경남=정원찬 작가]1. 세조를 제거할 절호의 기회세조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온 명나라 사신이 태평관에서 머물고 있었다. 세조의 극진한 대우를 받으며 그들은 벌써 2달째 머물고 있었다. 정통성이 없이 즉위한 세조가 기댈 언덕은 명나라였기 때문에 세조는 그들을 위해서라면 못할 게 없었다. 그래서 그들을 위해 창덕궁 광연전에서 축하연을 베풀 계획이었다. 세조는 물론이고 상왕인 단종과 세자도 함께 참석하는 연회였다. 경호를 위하여 무장 성승(성삼문의 아버지), 유응부, 박쟁을 별운검으로 임명했다.세조를 죽이고 단종을 복위
[한국농어촌방송/경남=정원찬 작가]1. 성삼문의 통곡1455년 윤6월 11일 빈청에 수양대군을 중심으로 그의 사람들이 모두 모였다. 단종을 지키고 있는 마지막 인물들을 제거하는 일을 논하는 자리였다. 세종의 6남이자 단종의 숙부인 금성대군, 단종의 매형이자 경혜공주의 남편인 영양위 정종, 세종의 후궁이자 단종의 양어머니 역할을 했던 혜빈 양씨, 그리고 그 아들들이 제거 대상의 중심 인물이었다. 수양대군 사람들이 대전으로 나아가 단종을 겁박하는 동안 수양대군은 경회루로 향했다. 넷째 동생을 제거하고 아버지 세종의 후궁을 제거하는 자리
[한국농어촌방송/경남=정원찬 작가]1. 단종의 주위 사람들을 제거하다수양대군에게 가장 거추장스런 존재는 혜빈 양씨였다. 그녀는 본래 궁녀였다. 세자(문종)의 병 수발을 하던 중에 세종의 눈에 들어 후궁이 된 인물이다. 단종이 태어날 무렵 그녀는 막내아들 영풍군을 키우고 있었다. 마침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은 손자 단종을 위해 세종은 혜빈 양씨에게 경혜공주와 단종의 양육을 부탁했다. 혜빈 양씨는 단종을 친아들보다 더 극진히 보살폈다. 단종이 성장한 뒤에도 혜빈 양씨의 품에서 잠들기를 원했을 만큼 혜빈 양씨와 단종 사이는 각별했다.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