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 헤이그에서 순국하다.      

 

1902년의 경운궁(덕수궁)
1902년의 경운궁(덕수궁)

 1907년 7월 14일 저녁 7시, 헤이그 특사 이준(1859∽1907)이 헤이그의 숙소인  바겐 스트라트(Wagen Straat) 124번지의 드융 호텔에서 갑자기 죽었다. 나이 48세였다. 

헤이그 특사의 동향을 일일이 파악하고 있었던 헤이그의 일본공사관은 일본 외무성에 ‘한국 황제 밀사 이준 병사(病死) 건(件)’을 보고했고, 일본 외무성은 7월 17일 오후에 이토 통감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문서번호 : 내전(來電) 제149호    
 발신일 : 1907년 7월 17일 오후 4시 7분 동경 발(發)
 발신자 : 진전(珍田) 외무차관     
 수신일 : 1907년 7월17일 오후 7시 58분 경성 착(着)   
 수신자 : 이토 통감     
 
 제목 : 한국 황제 밀사 이준 병사(病死) 건(件)

한국인 이준 얼굴의 종기를 절개한 결과 단독증(丹毒病:헌데나 다친 곳에 연쇄상 구균이 들어가 생기는 급성 전염병)으로 엊그제 사망하여 오늘 아침 매장했음. 장례에 참석한 자는 호텔 사환과 동행한 한국인뿐임. 자살이라는 소문을 퍼뜨리는 자가 있으나 앞에 기록한 사실은 차츰 세상에 알려질 것으로 믿음.”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주한일본공사관기록 통감부 문서 5권, 헤이그밀사사건및한일협약체결)

한편 헤이그에 있는 <만국평화회의보>와 <헤이그 신보>는 7월 17일 자신문에 “이준이 얼굴의 종기를 제거하기 위한 수술 뒤 패혈증에 걸려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데 텔레그라프(De Telegraaf)>도 7월 17일에 “이준은 볼에 종기를 앓고 있었고 이를 수술로 제거했는데 불행하게도 이 수술의 충격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고종의 퇴위 논의가 분분했던 한국에는 전혀 다른 내용으로 보도되었다. 1907년 7월 18일 자 <대한매일신보> 호외는 “어제 동경 전보를 접한즉 이준 씨는 분격을 이기지 못하여 자기의 복부를 할부자처(割剖自處)하여 만국 사신 앞에 열혈을 뿌려 만국을 경동하였다더라.”라고 이준의 순국 소식을 전하였다. <황성신문>도 다음날 같은 내용의 기사를 실었다. 1)

7월 16일에 이준의 유해는 헤이그 아이큰 다우 공동묘지에 가매장되었다. 장례식은 이상설과 호텔 주인만이 참석한 가운데 침울하게 치러졌다. 한편 아내 앨리자베타의 와병 소식을 듣고 급히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갔던 이위종은 이준의 장례식 이틀 뒤에 헤이그에 도착했다.  

이후 미국의 여론을 얻고자 한 달 동안 미국에 갔던 이상설・이위종이 8월 31일에 다시 헤이그에 나타났다. 9월 6일 오전 11시에 이준의 정식 장례식이 이준의 사촌동생 이운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이준은 뉘애크 엔다운 시립묘지에 안장하였다. 

비문에 이상설이 ‘이준(李儁)’이라 이름자를 썼고 이위종이 영문으로 “1859년 한국 북청에서 출생하여 1907년 화란(和蘭) 공화국 헤이그에서 순절하다.”라고 썼다.

한편 1945년 해방 이후 이준 열사에 대한 추모사업이 본격화되어 1946년 5월 이준열사추념대회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7월 14일 순국 39주년을 맞아 이준 열사 추도식이 이승만과 김구 등이 참석한 가운데 천도교당에서 거행되었다. 
1947년 8월에 체신부는 순국 40주년 기념 우표를 발행하였고 9월에는 ‘일성 이준선생기념사업회’가 결성되었다. 

이후 유해 봉환 문제가 본격화되어 1963년 9월 30일에 이준의 유해가 순국 55년 만에 헤이그에서 고국으로 송환되었고, 10월 4일에 국민장(國民葬)을 치른 뒤 서울 수유리 선열 묘지에 안장되었다. 

주1) <대한매일신보>의 오보로 지금도 이준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장에서 할복자살한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1956년에 문교부 장관은 국사편찬위원회에 진상 조사를 요청하였고 1962년에 국사편찬위원회는 이준은 할복자살이 아니라 분사(憤死)했다고 발표했다. 
(김태웅·김대호 지음, 한국 근대사를 꿰뚫는 질문 29, p 40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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